강희언 <사인휘호士人揮毫> (≪사인삼경士人三景≫ 중) 종이에 수묵담채, 26x21cm, 개인
머리에는 갓을 쓰거나 벗거나, 복장도 다소 자유로운 남자 5명이 마루 바닥에 앉아 있다. 사방이 트인 너른 정자 안에서 서화를 그리거나 쓰고 있는 네 사람과 이를 지켜보는 한 사람인데 이들은 서로 친숙한 관계인 듯 모두 행동이 자연스럽다. 훌러덩 벗은 일인과 푸르름이 뚝뚝 묻어나는 배경의 나무 덕에 이 계절이 여름임을 알 수 있다. 매미소리가 함께 들려오는 듯하다.
살짝 살짝 음영법도 보이면서 인체의 포즈도 어색하지 않게 그린, 맑은 채색이 은은히 곁들여진 풍속화이다. 안에 그려진 인물들이 선비 모습을 하고 서화를 하고 있으니 사인풍속도라고 할 만하다. 주문 받아서 그린 그림일까? 아니면 그린 사람 본인의 주변인들의 모습을 담은 것일까? 그림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이 궁금해진다.
그린 이는 담졸 강희언(淡拙 姜熙彦 1738~1784 이전). 그의 본업은 기상과 천문 업무 담당인 관상감 공무원이었다. 17세에 천문, 풍수관련 기술직인 운과(雲科)에 붙어서 관상감에서 오랜 기간 일해 천문학겸교수(天文學兼敎授, 관상감 종6품)에 이르렀고, 40대 중반에 이른 죽음을 맞기 전까지 의영고* 주부(主簿 종6품 관직), 조지서** 별제(別提 종6품 관직)를 맡기도 했다. 순천에서 감목관(監牧官 지방의 목장(말)을 관장하는 종6품 외관직)으로도 재직했다. 현대로 말하자면 주사보다는 높고 사무관보다는 낮은 종6품이 최고직이었던 중인이다.
그의 집안은 어떠했나. 5대조 할아버지가 의과에 합격했었고 아버지는 정4품의 외관직 장수(무관) 만호 벼슬을 지냈던 무관이며 강희언과 두 동생, 강희언의 아들은 운과에 합격, 관상감에 근무했다고 한다. 전형적인 중인 집안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외할아버지인 역관 출신 정래교는 학문이 뛰어나 같은 동네에 살았던 정선, 김창흡 형제 등의 노론 문인들과 친하게 지냈다. 양반, 중인 자제들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었고, 중인 자제들은 모두 정래교에게서 글을 배웠다 할 정도로 선생님으로 유명했었던 것 같다.
자세한 정황이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강희언은 외할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옆집 할아버지 정선에게서 그림을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 정선(1676-1759)은 강희언보다 62살 많아 70대할아버지였을 때 만났을 것이다. 정선은 강희언이 22살이 되었을 때 생을 마감했다.
강희언이 남긴 그림은 많지 않은데, 감각적으로 인왕산 서쪽 측면을 그린 <도화동망인왕산도>(또는 인왕산도)와 자신의 출근길이었을지 모를 창덕궁 앞의 새벽 모습을 그린 <북궐조무도> 같이 실경을 그린 것이 유명하고, 이 그림 <사인휘호도>와 함께 선비들의 모습을 그린 ‘사인삼경도士人三景圖’ 세 그림이 대표작이 된다.
≪사인삼경士人三景≫ 중〈사인시음도士人詩吟圖>
≪사인삼경士人三景≫ 중〈사인사예도士人射藝圖〉 활쏘기
사인, 즉 선비의 모습이라고 했으나 이들은 양반 대가집 자제들이 아니라 강희언의 주변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 당시 분위기를 고려하면 떠오르던 중인 지식인들의 활동 모습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언급했던 것처럼 강희언은 관상감 등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었으나 유명 화가가 이웃이어서 (정선) 그림도 배울 수 있었고 강희언보다 25살 나이가 더 많았던 강세황(1713-1791)과도 교유가 두터웠다고 한다. 강세황은 <인왕산도> 상단에 직접 “박진감이 넘친다”는 화제를 썼다.
寫眞境者 每患而使乎也圖 而此幅 旣得十分逼眞 且不失畵家諸法
진경을 그리는 자는 그림이 지도와 같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충분히 사실적이고 또한 화가들의 여러 화법을 잃지 않았다.
(인왕산도에 더해진 강세황의 평)
<도화동망인왕산도> 종이에 수묵담채, 42.6x24.6cm, 개인
이밖에도 강희언은 여항 수장가 감식가였던 마성린, 그의 그림을 화첩에 묶은 소장가 김광국, 화원 신한평, 김응환과 교유했다. 화원들이 강희언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에 강희언이 종이를 다루는 조지서에서 근무한 경험 때문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사람의 인간관계는 넓다기보다는 핵심적인 면이 있다. 사인삼경도에서 느낄 수 있듯 그의 풍속도는 김홍도의 행려풍속도 병풍과 필치가 비슷한 감이 있는데, 그보다 7살 어린 김홍도와도 나름의 인연을 맺었다.
1774년, 강희언이 서른이 된 해, 그와 김홍도는 같은 인사발령 기록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다. 5월 20일자 인사발령 기록을 보면,
“의영고의 주부로는 조지서 별제인 강희언을 수망(首望)으로, 빙고 별제 이우창을 이망(二望)으로, 장원서 별제 김홍도를 삼망(三望)으로 올렸는데, 수망이 낙점되었다”고 되어 있다. 즉 강희언이 의영고 주부가 될 때, 세 사람의 심사 대상 중 한 사람이 김홍도였던 것이다. 이때 김홍도는 장원서(정원, 화초, 과일 등의 관리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된 관서)의 별제였다.
3년 후인 1777년 서울 중부동의 그의 집에서 김홍도, 신한평, 이인문 등과 모여 주문을 받은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보다 중요하다.
“별제 김홍도, 만호 신한평, 주부 김응환, 주부 이인문, 주부 한종일, 주부 이종현 등 유명한 화사들이 중부동 감목관 희언의 집에 모였는데 공사(公私)의 수응(酬應:남의 요구에 응함)에 볼만한 것이 많았다. 나는 본래 그림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어 봄부터 겨울까지 드나들었으며 감상을 하기도 하고 혹은 화제(畵題)를 쓰기도 했다.”(마성린의 기록)
(강희언은 고령 신씨와 결혼함. 장인 신응순과 화원 신한평은 먼 인척)
다음 해인 1778년 김홍도의 <행려풍속도> 8폭병풍 관지에 보면 “무술년 4월 사능(김홍도)이 담졸헌(강희언의 집)에서 그렸다”고 되어 있어, 이 모임이 적어도 1년 이상 계속된 것을 알 수 있다.
강희언이 언제 죽음을 맞이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김홍도의 그림 <단원도> 제발문을 통해 1781-84 사이에 사망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1781년 강희언과 김홍도가 당대 유명 여행칼럼니스트 정란과 함께 서울 김홍도의 집에 셋이 모여 봄의 풍류를 즐겼던 모습이다.
그림이 그려진 것은 3년 후 1784년 김홍도가 안기 역에 내려가 찰방을 지내고 있을 때 정란이 방문하여, 이제는 세상에 없는 강희언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겨 그 때의 모임을 그린 것이다.
즉, 강희언은 적어도 1781년까지는 살아있었고, 이 그림이 그려진 1784년에는 이미 세상을 떠났음도 제발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1781년 강희언과 김홍도가 당대 유명 여행칼럼니스트 정란과 함께 서울 김홍도의 집에 셋이 모여 봄의 풍류를 즐겼던 모습이다.
그림이 그려진 것은 3년 후 1784년 김홍도가 안기 역에 내려가 찰방을 지내고 있을 때 정란이 방문하여, 이제는 세상에 없는 강희언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겨 그 때의 모임을 그린 것이다.
즉, 강희언은 적어도 1781년까지는 살아있었고, 이 그림이 그려진 1784년에는 이미 세상을 떠났음도 제발문을 통해 알 수 있다.
김홍도의 <단원도> 부분
김홍도의 <단원도> 부분.
제발 내용 : 1781년(단원 37세) 12월 입춘이 지난 후 정란, 강희언과 함께 우리집 사랑방 마루에서 세 사람의 모임을 ‘진실되고 법식에 거리낌 없는 모임’이라는 의미로 ‘진솔회(眞率會)’라 이름을 짓고 소박한 잔치를 열었다.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는 이가 김홍도, 무릎을 세운 채 부채질을 하며 거문고 소리를 듣고 있는 이가 강희언, 그 옆에 앉아 장단에 맞춰 시를 읊고 있는 이가 정란이다.
(상단에 고송유수관도인 이문욱이 보았다는 관화기가 있다. 정란이 가지고 있다가 이 그림을 김홍도 친구 이인문에게 보여준 듯하다.)
관상감으로 일하면서 이러한 행적을 남긴 그의 인생과 생각, 당시의 평가 등이 궁금한데, 근역서화징에는 ‘누구누구 아들 누구의 외손이고 감목관인데 그림을 잘 그렸다’ 정도로만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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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영고(義盈庫, 기름 꿀, 후추 등을 관리하는 호조 소속 관아)
** 조지서(造紙署 종이 뜨는 일을 맡은 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