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국金明國(1600~?), <노엽달마도蘆葉達磨圖> 종이에 수묵, 97.6x48.2cm, 국립중앙박물관
1636년 병자사행의 부사 김세렴金世濂(1593-1646)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글씨와 그림을 청하는 왜인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朴之英 · 趙廷玹 · 金明國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는데, 심지어 김명국은 울려고까지 했다.
(金世㾾, 「海槎錄」(崇禎九年丙子),“倭人求書畫者 日夜坌集 朴之英趙廷玹金明國 不勝其苦 金明國至欲出涕”)
이렇게 인기가 있으니 1643년 수행화원으로 김명국이 다시 선발된 것은 당연한데, 이 사람은 그다지 준법정신이 없었는지 통신사로 가는 길에 인삼 밀매로 돈을 벌려고 숨겨뒀다가 들켰다는 기록도 있다. 조금 낮은 관료의 부름에 응하기를 거부하고 대필代筆을 시키기도 하고, 놀기를 좋아하여 건성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있어 일본 정부측의 불만을 사기도 한 일이 확인된다.(후에 아버지 상중에 새장가를 들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김명국이 어떻게 그림을 배우게 되었는지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유일한 기년작으로 그가 63세에 그린 《사시팔경도첩》조차 조선 전기 크게 유행했던 안견의 화풍을 볼 수 있어, 초기만 아니라 만년에도 다양한 화풍으로 그림을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을 화원다운 면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뭐니뭐니해도 그의 대표작은 대담하고 간략한 붓질의 인물화 또는 산수인물화들이다. 툭툭 무심한 듯이 그린 인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선(禪)적인 면, 거칠고 힘이 느껴지면서도 자유로운 날렵한 선을 감필법으로 최소화해서 인물의 형상을 드러낸다. 그의 화풍을 광태사학과 연결지어 평가하기도 하는데, 광태사학은 절파를 폄하하려고 쓰였던, 문인화가의 우월감이 배어든 용어로 이것이 김명국의 화풍을 설명하는지에 대한 여부는 조금 더 논의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어떻게 전파되었든 후기의 절파 화풍과 공통점을 가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된 듯하다. 감필인물화는 선묘-백묘를 발전시킨 것으로 이러한 그림은 경중을 떠나 선종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해서 선종화법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러한 화법은 김명국 외의 다른 중기 회화에서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이 달마도의 경우 완전히 옆면만을 드러내는 프로필인데, 표정의 생동감이 대단하다. 농담을 자유로이 운용하고 필선에 속도감과 힘이 넘친다. 감필이란 이런 것임을 보여준다. 더 이상 생략할 수 없는 것까지, 끝까지 가서 그 형상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속에 대상의 정신을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여야 하기 때문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함께 타고난 재능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필법에 뛰어났던 중국의 화가를 찾아가 보면 남송의 양해(梁楷, c.1140 - c.1210) 등이 있다. 화원화가였던 양해는 몇 획의 선 만으로 자연에 동화된 당대의 천재 시인 이태백(李白, 701-762)의 기질과 사상을 그대로 표현해 걸작으로 남아 있다.
양해 <太白行吟图> 81.1x30.5 cm 도쿄국립박물관
도석인물인 달마도, 유명인사 시인인 이태백도 아닌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을 이런 식의 감필로 그린 김명국의 명작이 국립중앙박물관에 한 점 더 있다. <은사도隱士圖>라고 부르는데, 두건을 두르고 대지팡이를 짚은 거사 한 사람의 뒷모습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으스스한 모습이다.
김명국 <은사도> 종이에 먹, 60.1x39.1cm, 국립중앙박물관
제발을 보고 김명국이 자신의 죽음을 그린 것이라 보는 의견도 있고, 이후에 감상자가 붙인 제발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無에서 有를 만들어 내니
어찌 이 형상을 말에 따라 그린 줄로 아는가
세상엔 시인이 많고 많은데
그 누가 흩어진 넋을 부르리
將無能作有 畵猊豈傳言 世上多騷客 誰招已散魂
그렇다면 그는 화가로서 최고의 생애를 살았을까? 지나친 개성 때문인지 화원이라는 한계 때문인지, 살아생전에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이후 그의 그림들이 전해지며 18세기에 인기가 급등, 그의 비범한 재능과 함께 술이나 규칙을 기만하는 그만의 기행 등 호방한 기질을 드러내는 여러 일화가 갖춰지면서 김명국에 대한 낭만적 이미지가 가공되어 갔다.
“김명국은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하여 남이 그림을 요구하면 곧 술부터 찾았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그 재주가 다 나오질 않았고 또 술에 만취하면 만취해서 제대로 잘 그릴 수가 없었다. 술에 취하고는 싶으나 아직은 덜 취한 상태에서만 오로지 잘 그릴 수 있었으니 그와 같이 잘 된 그림은 아주 드물고 세상에 전하는 그림 중에는 술이 덜 취하거나 아주 취해 버린 상태에서 그린 것이 많아 마치 용과 지렁이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남태응(1687-1740) 청죽화사 중)
(남태응(1687-1740) 청죽화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