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린, <세이켄지淸見寺> ≪사로승구도권槎路勝區圖卷≫ 국립중앙박물관
사로승구도권의 <세이켄지> 부분
세이켄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통신사를 맞아 그곳에서 숙박할 수 있도록 한 곳으로, 이 절이 조선통신사들의 주 방문지가 되면서 이곳에 그들이 남긴 그림이나 글씨가 보관되고 있어 1994년에는 '조선통신사 유적'으로 일본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 절의 종루에는 '경요세계(아름다운 구슬들이 서로를 비추는 화엄의 세계)'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는데 1634년 이곳을 방문한 통신사 일행 중 박안기라는 사람이 남긴 것이다. 두 개의 구슬 '경요'는 조선과 일본을 상징한다. 산문의 편액에 걸린 '동해명구'는 1711년 통신사 현덕원의 글씨이고, 효종 6년에 왔던 정사 조행의 글씨도 편액으로 남아 있다. 도화서 화원인 서암 김유성이 1763년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가서 남긴 금강산도와 낙산사도가 가장 유명한 보물이다.
≪사로승구도권≫에 포함된 그림들은 사행을 가는 도중에 본 경치나 인상적인 장면을 그리고 각 장면의 상단에 제목(장소)만을 적었다. 다른 기록이 없지만 통신사행 기록과의 비교로 1748년 무진 통신사행의 장면임을 특정할 수 있다. 상권의 15면은 사행의 주요 경유지들을 골고루 포함한 실경산수로 이루어졌고, 하권의 15면은 회화식 지도나 풍속화, 기록화 등과 같이 다양한 성격의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다.
후지산
에도
시모노세키
우시마도
비와 호
이들의 경로는 무시무시했다. 대략 400~500명의 대규모 인원이 이동하며 수로와 육로를 이용해 한 번 다녀오는 데 거의 1년의 시간이 걸렸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출발한 사행은 쓰시마를 거쳐 이키(壱岐), 아이노시마(藍島)를 지나서 본토에 진입, 일본 내해를 따라 가미노세키(上関), 우시마도(牛窓), 무로츠(室津), 효고(兵庫) 등을 지나 오사카(大坂)의 시리나시가와(尻無川)에 도착한다. 여기까지 3,190리. 여기서 일본의 금루선으로 120리 물길을 따라 가서 요도가와(淀川)에 이르고, 이후 육로로 교토, 히코네, 나고야, 오카자키, 마시마, 하코네, 오다와라, 시나가와를 거치는 1,330리 길을 가서 최종적으로 에도(江戸)에 도달한다.
바다-강-육지, 항구와 주요 경승지와 도시를 두루 거치면서 일본 각지를 관찰하고 문화를 체험할 기회가 많았다. 초기에는 글씨나 그림이 중심이 되어 교류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문화사행으로 의미 확장. 조선과 일본 문사들이 모여 시문창화를 하는 것. 오사카에서 머물 때 시문을 창화하고 에도에 갔다가 한 달 만에 돌아오면 그 시문들이 이미 책으로 엮여 발행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사신과 문화사절을 파견하는 통신사행은 모두 열 두 번이 있었다. 임진왜란 후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요청으로 1607년에 시작되어 1811년에 마지막 사행이 있었는데, 대규모의 인원 이동을 위해서 양쪽 나라가 감당해야 할 비용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것이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통신사행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은 양국이 서로 다르지만 그런 비용을 치르더라도 기꺼이 수행할 동기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살피고 회유하기 위함이 일차적인 것이었고, 일본은 새로 건립된 막부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한 것이 가장 컸다.
사행단은 그곳에서 몇 개월을 머무르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자연스럽게 문화교류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기회를 통해 서로 얻은 정보와 영향력은 사뭇 엄청났을 것이다. 문신들은 선진국도 아닌 왜놈 나라를, 고생이 뻔한 사행길을 기꺼운 마음으로 떠나지는 못했을 것이고, 화원들도 호기심은 있었을지 몰라도 뱃길에 죽을 걱정부터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국에서 얻은 신선함과 설렘 외에도 그들의 삶과 문화에서 더 넓은 세상을 보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1748년(영조 24년) 무진사행의 수행화원이었던 이성린은 역관을 많이 배출한 중인 전주 이씨 집안으로, 1682년 임술사행의 수행화원 함제건咸梯健의 외증손이자 1719년 기해사행의 수행화원인 함세휘咸世輝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영조 대에 다양한 궁중의 행사에 기록을 남긴, 활발히 활동한 화원으로 이후의 전주 이씨가 화원 가문으로 확립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들 이종현과 이종근이 화원으로 활동하였고, 이종현의 아들 이윤민, 이수민, 또 이윤민의 아들 이형록 모두 이름을 남긴 화원들이다. 통신사 수행화원 외에도 1773년에는 55세의 나이로 중국으로의 사행使行에 수행화원으로도 다녀왔다.
사로승구도권은 실경을 그린 것이지만 화원으로서 이성린은 자신의 정체성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조심스럽게 그렸다. 화원다운 실경산수라고 할까. 당시 성행한 정선화풍의 기법을 부분적으로 차용하였다. 더불어 기록화나 회화식 지도, 풍속화적인 요소 등 다양한 표현을 실험적으로 쓴 것처럼 보인다. 작품에 묘사된 실경은 충실한 편이지만 곳곳의 지형과 경물을 표현하는 데에 정확성이나 완성도 기준으로 보면 한계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사로승구도권≫은 201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