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金禔, 1524~1593) <한림제설도> 비단에 먹, 53x67.3 cm, 클리블랜드미술관
쪽에 절벽과 둔덕, 작은 인물들과 나무 등 그림의 제재들이 몰려 있고, 화면 오른쪽은 멀리 산을 배경으로 해서 넓은 겨울 강 위에 다리가 쓸쓸하게 그려져 있다. 언뜻 보더라도 조선 후기의 산수도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고 조선 초기 안견파들의 그림과 유사한 점들을 찾을 수 있다.
왼쪽에 써 있는 글씨는 ‘萬曆甲申秋養松居士爲安士確作寒林霽雪圖 갑신년 가을에 양송거사가 안사확을 위하여 한림제설도를 그리다'라는 그림정보, 관지款識가 단정한 해서체로 써 있다. 한림제설도, 즉 추운 숲에 내리던 눈이 개는 상황을 그렸고, '金禔季綏”라고 써 있는 인장을 통해 자(字)가 계수季綏인 김시金禔, 1524∼1593가 그린 그림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그림이 그려진 갑신년은 1584년이 된다. 이 그림을 멋지다고 생각하든지 아니든지 간에 귀하디 귀한 임진왜란 이전에 그려지고 그린 사람도 확실한 회화라는 것만으로도 귀한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
정유삼흉으로 사사된 김안로의 아들
척 보기에 그리 대단할 것 없어 보이는 그림일지도 모른다. 몽유도원도나 인왕제색도가 주는 압도의 느낌도 없고, 아기자기한 구성이나 스토리 덕에 흥미롭다고 보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그림이 중요한 것은 명확한 배경정보를 가진 이 그림으로 인해 이 시기에 화단의 중심이 된 이가 그렸던 그림의 양상이나 안견 풍의 그림이 전해진 모습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들여다볼수록 훌륭하고 매력적인 그림인 것도 맞고.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임진왜란 직전 선조 때에 활동하던 화가 양송당 김시이다(한동안은 그 이름의 한자를 ‘제’라고 읽어 ‘김제’로 써 있는 미술사 책도 많이 있다. 지금 현재 ‘김시’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 사람의 아버지는 의외의 유명인물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좌의정에까지 올랐던 김안로1481~1537이다. 연안 김씨 김안로는 조선왕조 드라마에서 간악한 대신으로 종종 등장한다.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화려하게 정계에 등장, 승승장구하다가 아들 희(김시의 둘째 형)를 중종의 딸 효혜공주와 혼인시키기도 했다. 본인이 탄핵과 복직을 겪기도 하며 여러 정적들을 유배 보내고 죽이기도 하면서 권력 다툼에 몰두했다. 벼슬이 좌의정에까지 이르렀지만 결국 중종의 비를 폐위시키려 했던 정유삼흉丁酉三凶이라 해서 유배를 간 후 사약을 받아 죽게 된다.
김안로가 사사되던 1537년 김시는 십대의 어린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대역 죄인으로 사사되었으니 관직에 나아갈 길이 막혔고 그는 어쩔 수 없이 과거시험을 포기, 서화에 몰두하는 것이 가능한 환경이 되었다. 기세 드높던 양반 집안이지만 기록에는 궁중의 그림 그리는 일에 화사로 참여하고 공훈을 세우기도 했다(1590년). 당시에 그림으로 명성이 높았던 덕에 필요에 의해 궁중에 불려지고, 이를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클리블랜드 미술관 소장품 한림제설도
사실 조선 그림들은 완성도가 높다고 하더라도 화첩에 묶인 작은 크기의 소품이 많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그림은 가로의 크기가 거의 70cm에 이르는 제대로 된 그림이다.
곱고 세련된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도서낙관이 분명하고 작품 이름과 누구를 위하여 그린 것인가까지 명확히 기록한 귀한 그림이다. 관지의 갑신년은 (1584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8년 전, 임란 이전의 작품 중 안견의 '몽유도원도' 다음으로 손꼽히는 의의를 두기도 한다.
곱고 세련된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도서낙관이 분명하고 작품 이름과 누구를 위하여 그린 것인가까지 명확히 기록한 귀한 그림이다. 관지의 갑신년은 (1584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8년 전, 임란 이전의 작품 중 안견의 '몽유도원도' 다음으로 손꼽히는 의의를 두기도 한다.
똑떨어지게 안견파의 그림이라고 하기 애매하지만 안견파 같은 특징도 분명히 있고 거기다 절파적 특징을 갖춰서 당시 화단이 어떤 분위기를 추구했는지 힌트가 될 만한 부분이 꽤 있다. 그림에서 안견파의 특징으로 꼽아지는 것들은 한쪽에 치우친 편파구도, 넓게 퍼져 있는 공간, 나무들의 표현에 보이는 해조묘법蟹爪描法, 나무와 정자가 있는 근경의 언덕, 먼 산들 위에 줄지어 서 있는 바늘 모양의 나무 등의 표현으로, 조선 초기 이래 한반도를 지배한 화풍이 대개 그렇다. 반면 거꾸로 매달린 듯한 주산의 모습이나 흑백의 대조가 심한 근경의 언덕 등의 표현은 명나라에서 전해진 절파 화풍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한림제설도〉는 조선 초기 안견파 화풍을 위주로 하고 명나라에서 들어온 절파 화풍을 약간 가미하여 제작된 것으로 조선 중기 산수화의 경향을 예시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림제설도> 부분
* 해조묘법은 나뭇잎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를 그리는 방법이다. 해조는 게의 발톱이라는 뜻으로 마치 게의 발처럼 안쪽으로 오그라들게 그리는 것으로 북송의 곽희(郭熙)는 이른 봄의 경치를 그리면서 나뭇잎이 없는 앙상한 가지를 그려 계절감을 나타냈는데, 그가 그린 나무는 앙상하며 가지는 안쪽으로 오그라들게 그린 해조묘법을 썼다.
영향력이 대단했던 화가 김시
우리에게 김시의 대표 그림은 소년이 나귀를 끌고가는 귀여운 모습을 담은 <동자견려도>이다. 이 화가는 조선 시대에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근대에 쓰여진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의 김시 항목에는 간략히 “以善畵名하고 多從士流遊하다” 즉, “그림 잘 그리는 것으로 이름이 났고 여러 선비들과 어울려 놀았다”고 하는 『해동호보海東號譜』의 기록이 옮겨져 있다. 그러나 숙종 때의 문인화가 윤두서는 그의 저술에서 김시를 ‘안견에 버금가는 화가’로 평가하기도 했고, 최립의 시문, 한호의 글씨와 더불어 당대의 삼절로 일컬어졌다는 기록도 있는 것을 보면 그 시기 영향력이 매우 컸던 화가였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한 사대부 양반 김안로의 아들 김시는 어떻게 해서 최고의 화가로 남을 수 있었을까. 좌의정의 아들이었지만 중죄를 지은 자의 자식이기에 천하게 여겨졌던 그림 그리는 화사 일을 맡아 하는 것에 무리가 없었던 것일까? 그 시절에 잘 나가는 양반 자제들과 어울리며 놀았고 김시의 그림을 감상하고 제시를 남겼다는 이들이 이황, 이이, 노수신 등이라는 것을 보면 그의 인생에서 자존심 상하는 일은 많지 않았을 것 같다는 추측은 해볼 수 있겠다.
양자의 아들 김식
그는 후사가 없어 셋째 형의 차남(김봉선)을 양자로 데리고 왔고, 그 양자가 낳은 아들이 김식金埴, 1579~1662이다. 1606년에 진사가 되었고, 현종 때 김천 찰방을 지냈다. 가법家法을 이어 산수와 영모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는데 그의 대표 그림은 역시 소 그림이다. 조선 중기의 가장 유명한 소 그림 전문화가였기 때문에 그 때 그려졌던 많은 비슷비슷한 소 그림이 김식 전칭작이 되어 버렸다. 그의 소 그림들은 대부분 산수 배경은 간단히 그리고 음영으로 표현하는 퉁퉁한 몸, X자로 그리는 입, 테두리를 희게 둘러 (똘똘해보이지는 않는) 선량해보이는 눈매, 평화롭고 따뜻한 그림의 분위기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김식 <고목우도> 종이에 수묵담채, 90.3x51.8cm,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