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 <계변가화溪邊佳話> 《혜원전신첩》 종이에 수묵채색, 28.2 x 35.6 cm, 간송미술관
신윤복의 풍속화 중에가 가장 인기 있는 그림은 단오날 그네를 타거나 냇가에서 몸을 씻는 여인들과 바위 뒤에 숨어 그들을 훔쳐보는 머리를 박박 깎은 동자승의 모습이 담긴 <단오풍정>일 것 같다. 이 그림이 들어있는 《혜원전신첩》에 냇가의 모습이 그려진 재미있는 그림을 하나 더 골라본다. <계변가화溪邊佳話> 즉 ‘시냇물가의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그림은 그림의 구성이나 인물의 모습이 이야기를 가득 머금고 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스틸 이미지. 큰 바위가 둘러싼 냇가 빨래터에 세 명의 여인이 있다. 거추장스럽게 가체를 머리에 올린 상태로 빨래에 전념하는 여인, 저고리 아래 젖가슴을 보인 상태에서 머리를 풀고(또는 땋고) 있는 여인, 저고리는 어디에 벗었는지 나체의 상반신을 가릴 생각도 없이 빨래를 털고 있는 나이 든 여인이다. 냇가 건너에는 손에 활을 들고 어디론가 가던 젊은 선비가 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이들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
조선시대 풍속화 중에 가장 훈남일 것으로 예상되는 독특한 자세로 표현된 남자. 반쯤 돌아서서 한손에 활을 쥔 멋진 뒤태를 선보이며 당당하게 여인들을 바라보는 선비는 반듯이 쓴 갓, 살짝 바람에 날리도록 연출된 옷자락이 깔끔하고, 옷소매가 활시위에 걸리지 않도록 왼쪽 팔목에 컬러풀한 팔찌를 대고 있다. 선비가 신고 있는 것이 짚신이어서, 지체높은 양반은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가체를 풀고 가슴을 드러낸 여인과 노골적인 시선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뻔뻔히 그녀를 보는 젊은 남자라니, 만약 신윤복의 세련된 선묘가 아니었다면 좀더 지저분한 느낌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이 그림을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것은 제삼자인 노파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의 표정은 심술궂기 그지없는데, 여성들만의 공간인 빨래터에 남자가 침입한 데 따른 불쾌감에 젊은 여성에 대한 시기심이 섞인 것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노파 캐릭터의 역할은 혜원전신첩 내 다른 풍속화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데 주인공을 받쳐주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환경과 시선을 두루두루 표현해 준다.
풍속화가 대개 그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신윤복의 풍속화는 뭔가 고상하고 높은 것이 아닌 주변의 생활 모습, 문화를 기록하고자 한 어느 정도의 자각이 엿보인다. 신윤복이 선비의 ‘노는’ 모습을 그린 결과물은 그 시대의 선비들이 ‘풍류’를 그림이나 시에서 다룰 때의 태도와는 대척점에 있지 않은가. 혜원이 사회적 주제의식. 신분 문제에 대한 자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근대적인 사실주의 관점과 유사하게 그림이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윤복의 아버지는 3차례나 어진 제작에 참여했던 유명한 화원이었다. 화원과 역관이 많았던 중인 집안 출신으로 태어났지만 그가 화원으로 참여한 기록은 전무하다.
그렇다면 실력이 없었을까? 신윤복의 그림은 통신사 사신들이 일본에 답례용으로 가져갔던 기록이 남아 있어서 (풍속화는 아니었지만) 공적인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릴 정도- 화원에 준할 정도의 그림 실력을 인정 받는 화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주장과 아버지가 화원이면 동시에 화원으로 입직할 수 없었던 제도 탓이라는 주장 등이 있는데, 제도 때문이든 본인의 그림들 때문이든 적어도 관료, 제도, 체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실력이 없었을까? 신윤복의 그림은 통신사 사신들이 일본에 답례용으로 가져갔던 기록이 남아 있어서 (풍속화는 아니었지만) 공적인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릴 정도- 화원에 준할 정도의 그림 실력을 인정 받는 화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주장과 아버지가 화원이면 동시에 화원으로 입직할 수 없었던 제도 탓이라는 주장 등이 있는데, 제도 때문이든 본인의 그림들 때문이든 적어도 관료, 제도, 체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