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련 <매화> 1851년, 종이에 먹, 109.0x21.3cm, 개인
국립광주박물관 《남종화의 거장 소치 허련 200년》전(2008)
세로 109cm, 가로 21.3cm의 길쭉한 화폭에 담백하게 여백을 두고 그린 매화도이다. 하단을 가로지르면서 굵은 가지 두엇이 자라나 위 아래로 뻗으며 활짝 꽃을 피워낸 묵매. 구불거리며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가지는 유연하면서도 가벼운 리듬을 가지고 있다. 우아한 멋을 가진 이러한 매화는 청나라 회화의 영향이나 개자원화전 류의 매화 그림을 떠올리게도 한다. 소치 허련(許鍊, 1808-1893)이 그린 매화에 고람 전기(田琦, 1825~1854)가 제를 달았다. 두 사람이 합작을 하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平生不讀梅花訣 胸裡槎牙苦未刪
參得涪翁奇絶語 嫩寒淸曉到孤山
參得涪翁奇絶語 嫩寒淸曉到孤山
평생 매화결을 읽지 못해 가슴 속 거친 싹을 도려내지 못하네
부옹(涪翁: 당 시인 陸龜蒙)의 기묘하고 빼어난 시어를 얻으려 새벽 추위를 무릅쓰고 고산에 이르렀네
小癡先生作此兩幅 一以胎予 一要拙題 聊爾塞命 但愧俗句不足以奉揚雅意耳 辛亥冬初陽日 琦記
소치 선생이 두 폭의 그림을 그려 한 폭은 나에게 주고 한 폭은 화제를 요청해 이 글로 부응하나 변변치 못한 내용으로 고아하신 뜻에 흡족할지 부끄러울 뿐이다.
신해년(1851) 초겨울에 전기 씀.
제의 앞 부분은 매화 그림에 전기가 지어 넣은 시이다. 뒷부분에 그림과 글씨를 넣은 배경이 등장한다. 이 그림은 신해년(1851년) 초겨울에 그려진 것으로 이때 소치 허련의 나이는 44세이고 고람 전기의 나이는 26세였다. 외자 이름을 가진 이 두 사람은 나이차가 있기는 하지만 추사 김정희라는 스승을 모셨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다만 한 사람은 80이 훌쩍 넘도록 장수했지만 한 사람은 30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스승 추사 김정희를 극진히 모신 것으로 유명한 허련은 전남 진도 외진 곳의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변변한 스승도 없이 그림을 그려오다가 초의선사의 소개로 김정희를 만나 인생이 바뀌었다. 그의 나이 32세(1839년)에 서울 장동에 있던 김정희의 집으로 올라와 그곳에서 지내면서 추사에게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스승 추사 김정희를 극진히 모신 것으로 유명한 허련은 전남 진도 외진 곳의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변변한 스승도 없이 그림을 그려오다가 초의선사의 소개로 김정희를 만나 인생이 바뀌었다. 그의 나이 32세(1839년)에 서울 장동에 있던 김정희의 집으로 올라와 그곳에서 지내면서 추사에게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김정희는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다가 이 해(1851년)에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과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를 갔다. 예림갑을록이라는 기록을 남긴 추사의 컴페티션/비평모임이 있었던 것이 1849년. 이때 전기와 허련도 화가 8명 중 하나로 참여했었다. 이 매화도는 스승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던 한 양반화가와 여항화가가 문인화로 뜻을 함께 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