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그림, 이한진 글씨 <암거천관巖居川觀> 《영정첩寧靜帖》25.5x16.7cm(그림) 개인 소장
대림화랑 조선시대회화전 공개(1992)
한 인물이 바위 위에서 냇물을 바라보는 관수도 주제는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를 포함해 개자원화전의 ‘고운공편심(高雲共片心)’과 유사한 많은 도상이 그려졌다. 김홍도의 이 그림의 인물은 일반적인 고사관수도와는 다르게 얼굴과 몸이 정면을 향한 상태로 아래 물결을 내려다보고 있는데다 화면이 꽉 찬 느낌이 들 정도로 존재감이 크다. 산과 물,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는 경지를 그리는 문인화에서 인물이 이토록 강조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 노인은 자신이 앉아있는 바위 바로 아래의 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바위 밑 쑥 들어간 곳은 물이 들어와 휘몰아치는 여울이다. 잔잔히 흘러내려오던 계곡물도 여울을 만나면 빠르게 돌아나가며 기포를 만들고 돌들의 모양을 따라 울룩불룩 오르내리다 다시 제 갈 길을 간다. 귀를 씻어내는 듯한 물소리와 함께 불규칙적인 이 움직임은 다른 잡념 없이 몇 시간이고 그것을 바라보게 만들 수 있다. 맹자도 “물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나니, 반드시 그 여울목을 보아야 하느니라觀水有術 必觀其瀾”라고 말하기도 했다. (『맹자』,「盡心 上」)
이 화첩에 있는 그림은 1787년에, 글씨는 1788년에 씌어졌다. 1787년이면 김홍도 나이가 43세로 한창 기량이 성숙해졌을 무렵이다. 그림에는 “丁未 午月初吉 檀園”이라고 씌어 있고, 이한진이 단 전서체의 제는 “巖居川觀”이다. 시조집 『청구영언』을 펴낸 것으로 잘 알려진 이한진은 연암 그룹의 이들과 친분이 있었다. 이규상의 『18세기 인물지』를 보면 이한진 항목에 '전서를 잘 썼는데 골기가 부족하였다. 한때 명관들이 많이 그의 전서를 요청해서 공가에 쓰이는 데 이바지했다' 라고 되어 있다. 다른 항목에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데 '이광섭이 충청병사로 부임하였는데....이한진은 전서와 퉁소를 잘 하였고, 김홍도는 그림을 잘 그렸는데 연풍현감으로 있었다. 이한진이 서울로부터 놀러오고 김홍도가 연풍에서 왔기에... 각자 편복으로 둘러앉아 자기의 재주를 마음껏 펼쳤다' 등으로 그들이 함께 어울려 글씨와 그림, 음악을 즐긴 것을 알 수 있다. 음악에 조예가 깊고 특히 퉁소를 잘 불었던 이한진은 모임에서 음악 담당이었고, 천재 화원이면서 문인으로서의 자질도 뛰어났던 김홍도와 예술적 교감이 있었을 것이다.
조금 아래 세대의 화가였던 기야 이방운(1861-?)이 김홍도의 이 그림을 그대로 모사하기도 했다.
김홍도와 이한진의 교유관계를 알려주며 그려진 시기가 적힌 귀중한 자료가 된 『영정첩』에는 이 그림 외에 김홍도가 그린 원숭이가 포함된 화조도, 나무에 매달린 새, 게와 연꽃, 국화 그림이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