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미상, <송도사장원계회도> 1772
때는 1612년, 당시
송도로 불리던 개성에 근무하던 관원 중 특이하게도 장원급제를 한 사람이 넷이나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만들고 이 모임의 이름을 ‘용두회(龍頭會)’라고 지었습니다. 용두회라는 낯간지러운 이름은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것을 계승한 것입니다.
1-2폭 태평관, 화담
3-4폭 박연폭포, 만월대
5-6폭 지족사, 발문
모임 후에 이들은 그것을 기념하면서 스케일 크게도 6폭 병풍을 제작했는데, 1폭은 송도 태평관에서 열렸던 용두회 장면, 2폭은 화담의 꽃놀이(서사정), 3폭은 박연폭포 감상(범사정), 4폭은 만월대에서 옛일을 회상, 5폭은 지족사의 종소리 듣기(종고루)입니다. 화담, 박연, 만월대, 지족사는 개성 인근의 명소로 이들이 모였던 장소인 듯합니다.
이 그림은 세월이 지나고 병풍이 파손되자 이를 아쉬워한 후손이 18세기에 다시 제작한 것입니다.
이 후손은 모임에 속해있던 홍이상(1549-1615)의 7세손 홍명한(1724-1774)입니다.
제 6폭의 발문은 홍이상이 동갑 친구인 호조판서 유근에게 간절히 부탁하여 쓰도록 한 것입니다. 발문에 따르면 1폭의 그림에서 북쪽으로 앉아 있는 사람이 홍이상(1759년 식년시 문과 장원), 동쪽으로 나란히 앉은 세 사람은 이시정(1600 별시 문과 장원), 윤영현(1588 사마시 장원), 차운로(1583 알성시 문과 장원)입니다.
용두회 네 사람
홍이상은 67세까지 살면서 이조정랑, 황해도안무사, 직제학, 동부승지, 경상도 관찰사, 형조참판, 대사성, 대사헌의 벼슬을 두루 지낸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김홍도가 그의 평생도를 그려 행복한 삶의 전형으로 여기진 것을 알 수 있기도 합니다.
박연폭포 부분
지금으로 치자면 서울대 수석졸업, 행시 수석 합격 정도의 경력을 가진 네 사람이 지방 시청에서 일하다가 만났다고 해야 할까요. 아마도 나이 차이는 꽤 있었겠지만 장원급제를 할 만큼 뛰어난 기량을 가졌던 인재들이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잡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며 서로에게 위안받고 자존감을 세운 자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