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겸 <천우각 금오계첩도> 1768, 33x21.6cm, 경기도박물관
남산 북쪽 기슭 골짜기에 있던 ‘천우각’에서의 나들이 장면을 그렸습니다.
나무에 불긋한 기운이 색칠되어 있는 것은 가을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 1711~1775)이 그린 그림이고, 명필로 이름이 높았던 조윤형이 글씨를 쓴 『금오계첩』 중에 들어 있습니다.
가장 많이 남아있는 관청 계첩인 ‘금오계첩’은 의금부(‘금오’는 의금부의 별칭)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그림은 천우각에서의 모임을 그렸지만 대부분의 금오계첩도는 의금부 관청의 전경과 함께 그곳에 모인 관원들의 연회 장면이 그려집니다.
1759년 금오계첩
이러한 관청의 계첩도는 누가 제작한 것일까요?
조선시대에는 관직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신래(新來) 혹은 신참(新參)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신래들은 일종의 인턴 과정을 거쳐 신래를 면하는 의식, 면신례(免新禮)를 통과해야만 관공서의 일원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관서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정식 근무자로 인정받는 ‘허참’이 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면신례라고 봤을 때 면신례는 정중한 의식이 아니라 희롱과 장난과 괴롭힘의 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신래를 희롱하는 놀이라는 뜻으로 신래희(新來戱)라고도 했다네요.
온갖 벌칙을 고안해서 신래들을 괴롭히는 이 면신례는 시대마다 관청마다 차이가 있지만 주로 네 단계로 나뉩니다.
1. 선배를 방문해 명함을 바치고 인사하기
2. 술과 음식, 연회를 장만해 선배들 접대하기
3. 선배들에게 온갖 미션을 받아 희롱당하기
4. 면신례를 기념하는 기념축 또는 기념첩을 선배들에게 선사하기
네 번째 단계에 그림이 등장합니다.
초기에는 연회 장면을 담은 축을 만드는데, 상단에는 연회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담고 하단에는 선배와 신래의 명단을 함께 기록했습니다.
화가에게 부탁해서 컬러풀하게 그림을 그리고 비단으로 장정해야 했으니, 연회에 쓰인 돈도 만만치 않은데 이 또한 신래들에게 큰 부담이었을 겁니다.
축을 만드는 관습은 그래서 점점 사라지고 조선 후기에는 간단한 수묵 그림과 명단을 책자 형태의 첩으로 제작하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작성된 계첩이나 계축은 관료 생활의 기념품이 되어 우리에게 많은 수 남겨지게 됩니다. 이 계첩은 신래들의 피땀눈물로 만들어진 것이지요.
우리가 종종 보는 계첩도는 그러니까 신입 공무원의 마지막 통과의례, 신고식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금오계첩이 많이 남아있는 것은 의금부의 면신례가 특별히 빡셌던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김윤겸 천우각 금오계첩 부분
사극에서 누명을 쓰고 추국이 진행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의금부는 왕명을 집행하는 사법기관으로, 겸직인 당상관 어른들을 제외하면 실무를 맡는 10명의 의금부 도사들이 고유한 내규를 가지고 운영되었습니다.
의금부 도사는 승문원 등 다른 기관에 비해 허참에 이르는 기간(면신)이 훨씬 길어 약 90일~6개월이 소요됐습니다.
그들만의 규약을 기록한 금오헌록을 보면, 면신례 뿐만 아니라 다양한 규약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필요한 규약도 있지만 선배들이 권위를 세우기 위해 신입에게 가혹한 신고식을 정교하게 만들어나간 것을 보면 그닥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검찰이나 경찰 등 대한민국에서 법을 집행하고 형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정의보다는 자신들만의 규약으로 똘똘 뭉치는 것이, 새로운 관습만은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