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일본인 미술품수집가 이리에 다케오入江毅夫씨는 자신의 한국미술 소장품 7백30여 점을 모아 도록을 만들어 펴냈습니다. 『유현재선 한국고서화도록(幽玄齋選 韓國古書畵圖錄)』이 그것으로, 유현재는 그의 당호입니다. 그가 그림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부터로 한국의 민화를 처음 보고 매력을 느꼈던 때문이라고 합니다. 조선 회화를 수집한 일본인들이 꽤 되긴 하지만 이정도 규모의 소장품 리스트는 독보적이었습니다. 이 도록에는 조선 초기의 소상팔경도, 심사정, 이인상, 강세황, 김정희, 허련 등의 서화 뿐 아니라 김생 글씨 탁본, 한석봉, 윤순 등 서예 작품 등이 다양하게 실려 있습니다.
이 목록 중에 조선시대 서울 선비들의 모습을 그린 《사인풍속도권士人風俗圖卷》이 있습니다. 북일영北一營, 남소영南小營, 세검정洗劍亭과 선비들 모임을 그린 기록입니다. 북일영은 조선시대 수도의 수비를 맡아보던 훈련도감의 분영, 즉 궁궐 호위부대 쯤 되는 곳으로 위치는 지금의 사직동에 해당합니다. 남소영은 왕 호위부대인 어영청의 분영으로 서울 중구 장충단에 위치합니다. 1970년대에 복원된 세검정은 영조 때(1747년) 이곳에 서울 방비를 위한 군시설인 총융청을 지으면서 군사들이 쉬는 정자를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세 곳 모두 수도방위와 관련된 군사시설의 일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傳 김홍도, <북일영>, <남소영>, <세검정>《사인풍속도권》 종이에 수묵채색, 각 34.5x45cm, 일본 유현재
북일영과 남소영 마당에서 날을 정해 활쏘기 연습을 했다고 하는데 위 그림 북일영 장면의 활쏘기는 훈련 모습이라기보다는 모임의 여흥으로 활쏘기 모습 같습니다. 세 그림 모두 도포를 차려입은 선비들이 떼로 나오는 큰 모임입니다.
19세기 말 세검정 @중앙일보
세검정의 ‘세검洗劍’ 즉, 검을 씻는다는 이름은 인조반정 때 반정 인사들이 광해군 폐위를 의논하며 칼을 갈아 씻었던 자리여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정자 앞에 너른 바위가 있어 여염집 아이들이 여기에 붓글씨를 연습하여 돌 위에 항상 먹물이 묻어 있었다고 하며, 일반적인 모임 장소로도 유명했던 것 같습니다. 그림의 장면에서는 꽤 많은 선비들이 모여 회식을 하고 있습니다. 정자 안에만 이십 여 명이 보이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선비들이 주변 바위나 물가에서 두런두런 한담을 즐기는 장면입니다. 음식을 준비하는 아낙네도 보입니다.
정교하게 그린 인물들, 건물, 물오른 버드나무와 다른 수목들 등을 볼 때 솜씨 있는 사람이 이 모임을 그림으로 남긴 것으로, 전형적인 필치는 아니지만 김홍도(1745~1806?)가 그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정교하게 그린 인물들, 건물, 물오른 버드나무와 다른 수목들 등을 볼 때 솜씨 있는 사람이 이 모임을 그림으로 남긴 것으로, 전형적인 필치는 아니지만 김홍도(1745~1806?)가 그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김홍도가 <세검정아집도>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기는 합니다. 서유구(1764-1845)가 어떤 그림을 보고 남긴 기록인데 글 제목이 ‘제세검정아집도’라고 되어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정자 안에 다섯 사람, 밖에 여섯 사람이 있다’고 하니, 다른 그림인 듯합니다. 남공철, 서노수, 박시수, 한씨, 이씨 등이 모였고, 그림을 그린 이는 단원 김홍도라고 씌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그림과 매우 아주 흡사한 그림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검정도는 눈을 크게 뜨고 위의 틀린그림 찾듯 하지 않으면 위의 세검정도와 다른 부분을 찾기 힘든데, 박물관의 기록에는 다만 조정규(趙廷奎 1791~?)가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傳 조정규, <세검정도> 종이에 수묵담채 32.9x44.1cm 도쿄국립박물관 오구라컬렉션
이것은 유현재 소장 사인풍속도권의 나머지 부분 <북일영>와 <남소영>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북일영> <남소영>은 사인풍속도권의 모습과 매우 흡사합니다. (박물관 측은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소장의 북일영과 남소영 그림. 각 32.6x43.7cm
즉, 유현재에 소장된 세 폭의 그림, 김홍도 전칭의 <북일영>, <남소영>, <세검정>은 모두 쌍둥이 같은 그림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쌍둥이 다른 세트의 <북일영>과 <남소영>은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되어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조정규 전칭 <세검정>은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죠. 이들 세트 중 유현재 소장본이 다른 쪽보다 조금 더 세밀하고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조정규 전칭의 <세검정>이 김홍도가 그린 유현재 소장본을 보고 후대에 임모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북일영, 남소영, 세검정 그림 비교. 왼쪽이 유현재 소장.
이 그림들은 누가, 왜 그린 것일까요. 모임의 연원, 그린 이, 임모하는 과정에 대한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현재 소장품 각각의 행방도 아직 확실치 않아서 자세한 연구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