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의 이미지에는 예쁘장한 풍속화가 겹쳐지지만 그도 산수화 등을 잘 그렸습니다. 그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 중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화첩이 하나 있습니다. 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혜원화첩》은 모두 8면으로, 양쪽 끝에 행서로 글씨가 씌어 있고, 그림은 여섯 면에 그려져 있습니다. 戊辰孟秋(1808년 음력7월)이라는 말이 적혀 있어 시기를 알 수 있는 귀한 자료이기도 하고, 재치있고 세밀한 풍속화가 아니라 거친 필묵의 산수인물화들이라 더 흥미롭습니다.
화첩의 여섯 폭 그림 중 네 번째 장면이 오늘 스크랩해 볼 그림입니다. 이 장면에는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어떤 인물(신선)이 생황을 불며 커다란 게 위에 앉아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이분은 게를 마음대로 조종하여 거친 바다를 편안히 건널 수 있는,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일 것입니다. 일단 화제를 보면 다음과 같이 써 있습니다.
古有騎鯨仙 又有騎蟹僊
옛날에 고래를 타고 다니는 신선이 있었고, 또 게를 타고 다니는 신선이 있었다
혜원 신윤복 <기해선인> 《혜원화첩》 삼성미술관 리움
옛날 신선 중에는 이것저것 신기한 것을 타고 다니는 재주를 부리는 사람이 많았나봅니다. 고래를 타고 다니는 신선이라면 이백을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 두보 시에서 그는 물에 빠져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고래를 타고 다니는 신선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으나 게를 타고 다니는 신선은 그렇지 않았던 것일까요. 어떤 신선은 고래 말고 게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고 화제에 쓰면서, 이 그림에서 인물이 게를 타는 것은 신비로운 신선의 모습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보탰습니다. 신선의 옷자락과 게의 다리는 두꺼운 선묘를 썼지만, 바다의 파도를 나타내는 데에는 가는 선묘를 가득히 채워 포말을 나타내었습니다. 이렇듯 파도가 요란한 바다와 생황을 불며 여유롭게 건너가는 신선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표현한 결과를 낳았습니다.등딱지가 넓은 게는 앉아서 바다를 건너기에 적합해 보이기도 합니다.
게보다 더 편안한 승선감을 기대해 볼 만한 것은 거북이겠지요. 김홍도가 그린 것일지도 모르는 그림 중 두 신선이 물고기(고래?)와 거북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작품이 있습니다.
전 김홍도 <양선도해도> 지본담채 26.4x36.4cm 선문대박물관
대표적으로 뭔가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분은 달마대사입니다. 이분은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갈대를 타고 바다를 건너 오셨다고 전해집니다.
김홍도, <달마좌수도해 達磨坐睡渡海> 지본담채, 38.4x26.6cm, 간송미술관
단원 김홍도의 그림 중에도 바다 위를 신기한 방법으로 건너가는 신선이나 노승의 그림이 꽤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새우입니다. 새우도 게와 갑각류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뒷모습을 보이는 작품은 특히 유사한 분위기를 볼 수 있습니다.
김홍도 <승하도해도乘蝦渡海圖> 지본수묵 24.7X60cm
김홍도 <승하좌수도해도乘蝦坐睡渡海圖> 지본담채 33.1x41cm,선문대박물관
미술품 경매에 나온 단원의 10폭짜리 소병풍 중 한 폭에도 새우를 탄 신선이 들어있는 모습이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각 16.5x22cm, 1.게(蟹圖), 2.북두칠성(北斗七星), 3.괴석(怪石), 4.새우탄 신선(乘鰕簫仙), 5.국화와 난초(蘭菊), 6.해상신선(海上神仙), 7.파초(芭蕉), 8.노승탁족(老僧濯足), 9.유어(遊魚), 10.호응(豪膺)
새우나 게가 ‘갑’각류로 좋은 의미를 지닌 그림으로 쓰인 것과 신선이 타고 가는 것에 어떤 의미가 더 더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에 험난한 바닷길을 신령스런 동물의 도움을 받아 편안하게 건너간다는 것으로 그 신선을 경외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역할을 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혜원 그림에서 바다를 건너는 장면을 보다보니 김홍도의 예가 많아졌습니다. 다시 혜원으로 돌아와 화첩에 있는 나머지 그림들을 소개합니다. 화첩에 등장하는 첫 그림은 대나무 잎과 난 잎으로 보이는데 달이 그 너머로 보입니다. 극한의 부감을 나타낸 것인지 물에 비친 달을 위에서 내려다본 것인지 아니면 그저 공간을 생각하지 않은 피상적인 이미지인지 모르겠습니다.
<월하난죽>
두 번째 장면은 그 달밤, 친구도 없이 술동이와 함께 널브러진 남자가 있습니다. 화제에는 다음처럼 쓰여 있습니다.
吸盡一甕酒醉 한 동이 술을 다 마시고 취하여
空山倒裏 텅빈 산에 자빠져 있으니
只有明月照幽獨 외로운 나를 비춰주는 밝은 달이 있구나
외로움이 가득한 그림입니다.
<취도월유>
세 번째 장면에는 깊은 산 속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얼핏 보기에도 두 사람은 무슨 대화인가를 나누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화제는 간단합니다.
相逢問何事 서로 만나 무슨 일인가를 묻는다
靑山與綠水 청산과 녹수
두 사람이 만나서 청산과 녹수에 대하여 묻는 것인지 청산과 녹수가 만난 것이라는 이야기인지, 이 속에서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청산과 녹수인지. 신선의 세계에 빠져들 듯 어지러운 이야기 같습니다.
<청산녹수>
다섯번째와 여섯번째 장면은 당나라 시인 왕유의 <수장소부>라는 시의 구절을 그린 것입니다.
松風吹解帶 솔바람이 불어와 허리띠를 푸니
山月照彈琴 산에 뜬 달이 가야금 타는 나를 비추는구나
山月照彈琴 산에 뜬 달이 가야금 타는 나를 비추는구나
獨立溪橋上 외로이 계곡 다리에 서 있으니
秋山夕陽邊 가을산 석양이 저물 때이다
<수하탄금>
<추산석양>
신윤복의 이런 산수인물화에서 남자를 느꼈다면 오버인가요. 쓸쓸하고 외로운 정서가 가득한 그의 그림에서 그의 삶은 외롭지 않았을지 상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