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북, <서설홍청(서치홍포)>, 지본채색, 20.0x19.0cm, 간송미술관
쥐 한 마리가 붉은 빛을 띤 무 같은 뿌리채소 위에 얌전히 올라앉아 있습니다. 안정된 구도와 색, 생생한 동물의 묘사 등 최북의 영모도 명성에 걸맞은 작품으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보통 ‘쥐가 홍당무를 갉아먹는 그림’으로 풀이하여 이야기 됩니다. 이 그림에 대해 여러 가지 궁금증이 한꺼번에 생겨나는데, 일단 이 채소가 무엇일지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요즘은 홍당무라는 말을 잘 쓰지 않고 당근이라고 보통 부르지요. 당근이든 홍당무든 이름에 ‘당’ 자가 들어가는 데서도 알 수 있듯 그 채소는 중국으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원래 있던 무와 달리 붉은 빛이 도는 무가 중국에서 들어와서 홍당무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의 그림에서 보이는 뿌리채소의 잎은 당근의 잎과는 사뭇 다릅니다.
당근과 그 잎
그림에서는 당근의 잎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보통 대하는 무의 잎과 비슷하죠. 물론 사물을 직접 보고 그 관찰력에 의지하여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이 적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직접 당근을 관찰하지 않고 그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쥐가 붉은 뿌리를 갉아먹는 그림 서설홍청은 심사정의 작품도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동일한 화보를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여겨집니다.
심사정 <서설홍청>, 지본채색, 21.3x23.5cm, 간송미술관
심사정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최북의 그림에서처럼 쥐가 마치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여 서양 동화에 나오는 장님 쥐같아서 재미있다는 점은 패스) 이파리는 무의 잎 같이 생겼고, 그 꽃의 모양도 당근 꽃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근 꽃
홍당무, 즉 우리가 자주 대하는 당근은 미나리과로, 흰색 꽃이 피는데, 이 꽃이 줄기 끝과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꽃줄기 끝에 산형꽃차례를 이루며 달려서 산형화목에 속합니다. 3000~4000개의 작은 꽃이 1주일간 핍니다. 아프가니스탄이 원산지로 중국에는 13세기 말에 중앙아시아로부터 들어왔고, 한국에서는 16세기부터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심사정의 그림에서보다 최북의 그림에서 무의 색이 당근의 주황색이라기보다 보라색에 가까운 것을 볼 수 있는데, 모양은 조금 다르지만 순무를 떠올리게 됩니다. 강화도에 가면 특산물로 붉은 보라빛을 띤 순무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이 순무는 십자화과의 식물로 홍당무와는 전혀 다른 잎과 꽃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순무와 순무 꽃(사진: 강화도 자연생태)
순무는 유럽 원산이며 중국으로부터 도래되었고, 잎은 보통 긴 타원형인데, 달걀을 거꾸로 세운 듯한 모양, 바소꼴, 때로는 무잎 모양으로 깃꼴로 갈라진 것도 있다고 합니다. 봄에 노란색의 십자화(十字花)가 달립니다.
당근은 미나리과, 순무는 무와 같은 집안인 십자화과이므로 갈래가 다른 것이죠.
또한, 서설홍청의 청(菁)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우거질 청, 순무 정 두 가지 뜻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서설홍청이라고 읽기보다는 서설홍정이라고 읽어야 맞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렇다면 화보에서는 쥐가 붉은 순무를 갉아먹는 것이었고, 이를 조선시대 화가들이 그릴 때는 잘 대하지 못하던 순무 대신 당근으로 받아들여 그린 것이 아닐까요? 무 잎과 꽃은 많이 보던 것이니 그대로 그리고. 홍당무의 잎이나 꽃을 관찰하지는 않고.
쥐가 붉은 무를 갉아먹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순무는 목숨을 살리는 채소로 여겨져 왔다는 점과 함께* 무는 한자로 나복(蘿蔔)이라고 쓰는데, 여기서의 '복'이 복 복(福)과 발음이 같아서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차용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사실 홍당무를 ‘홍나복(紅蘿蔔)’이라고도 쓰므로 복을 비는 마음으로 당근을 그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심사정의 <서설홍청>을 더 찾아보면, 색은 당근이 확실한데 모양은 여전히 무라서, 혹시 당시의 안료 문제일까도 생각해 봅니다.
심사정 <서설홍청> 다른 그림들.
심사정은 쥐가 없이 채소만을 그린 적도 있습니다.
심사정 <홍당무> 종이에 수묵담채 23.0X28.0 cm (서울옥션 67회 고미술경매)
쥐가 채소밭에서 이것저것 갉아먹는 일은 흔한 일이었을 텐데 흔한 무가 아니라 홍당무 또는 순무를 갉아먹는 그림을 그린 데에 결정적으로는 어떤 화보가 그 중심에 있었는지, 그 화보가 그려진 원래의 의미가 정확하게 어떤 기복의 의미였는지 궁금해집니다. 쥐가 복을 갉아먹는 그림을 집에 걸어놓고 싶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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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강부지에 따르면 목숨을 살리는 채소를 의미하는 ‘復生菜’ 라 불렀으며, 곤명에서는 흰 것을 ‘小白蘿蔔’, 붉은 것을 ‘漢中蘿蔔’라 불렀다. 순무는 武侯(제갈공명)가 남쪽을 정벌할 때 산에서 순무를 먹고 군대의 식량을 해결했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중요한 채소였다. 이러한 얘기는 당대의 시인 劉禹錫(772-842)의 『嘉話錄』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순무를 ‘諸葛菜’라 불렀다. 『民國新纂雲南通志(二)』 卷62, 物産考五 , p.12. (民國時期 雲南의 自然生態와 經濟貿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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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강부지에 따르면 목숨을 살리는 채소를 의미하는 ‘復生菜’ 라 불렀으며, 곤명에서는 흰 것을 ‘小白蘿蔔’, 붉은 것을 ‘漢中蘿蔔’라 불렀다. 순무는 武侯(제갈공명)가 남쪽을 정벌할 때 산에서 순무를 먹고 군대의 식량을 해결했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중요한 채소였다. 이러한 얘기는 당대의 시인 劉禹錫(772-842)의 『嘉話錄』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순무를 ‘諸葛菜’라 불렀다. 『民國新纂雲南通志(二)』 卷62, 物産考五 , p.12. (民國時期 雲南의 自然生態와 經濟貿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