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제일의 도시가 된지 600년인 서울.
조선시대의 그림에서 그 서울의 모습을 그린 풍경도 당연히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 겸재 정선의 <필운대상춘>을 들여다보며 봄을 느껴볼까 합니다.
정선鄭敾(1676-1759)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 27.5x33.5cm
제목의 ‘필운대상춘’은 ‘필운대’라는 높다란 바위에서 ‘상춘’ 즉, 봄을 즐기는 모습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득공 부자가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요약, 기록한 핸드북 『한경지략』에는 필운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필운대 밑에 있는 도원수 권율(權慄)의 집이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처갓집이므로, 그는 그곳에 살면서 스스로 별호를 필운(弼雲)이라고 하였다. 지금 바위벽에 새겨져 있는 ‘필운대(弼雲臺)’ 석자가 바로 오성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 필운대 옆에 꽃나무를 많이 심어서, 성안 사람들이 봄날 꽃구경하는 곳으로는 먼저 여기를 꼽는다. 시중 사람들이 술병을 차고 와서 시를 짓느라고 날마다 모여든다. 흔히 여기서 짓는 시를 “필운대 풍월”이라고 한다.“
필운대는 현재 서울 종로구 필운동 배화여자고등학교에 위치한 인왕산자락의 바위로
조선 선조 때의 재상 이항복(李恒福)의 옛 집터여서 현재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필운대
백사 이항복(1556~1618) 초상, 작자미상 17세기 지본채색 서울대학교 박물관소장
당시 필운대의 꽃구경은 너무도 유명해서,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이덕무, 심지어 정조대왕도 필운대의 상춘에 대한 시를 지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화면 중심에서 약간 오른쪽에 필운대 위에 둘러앉은 선비들의 모습이 보이고,
왼쪽으로 펼쳐져 있는 동리 모습이 18세기 전반기의 한양 시가지 모습인데
화사한 봄이 시작된 듯 곳곳에 연분홍 꽃들로 치장돼 있습니다.
화면 왼쪽 상단 멀리 검은 점을 찍어 그린 산은 남산으로 추측됩니다.
남산 오른쪽 저 너머로 푸른빛으로 희미하게 이른바 遠山을 나타낸 봉우리들은
관악산일 것입니다. 실제 모습과 비슷한가요?
인왕산에서 관악산이 그림처럼 저 위치에 저런 크기로 보였을까 하는 것은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사물을 보는 시각과 그림에서의 시각을 분리시켜 생각했던 때임을 고려할 때,
또 산의 동편 자락을 톱날처럼 삐죽삐죽 그린 것으로 보아
오른쪽 산이 관악산이라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관악산 연봉 밑을 자세히 보면 남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등성이 위에 누각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것은 어떤 건물일까요?
인왕산 쪽에서 남산쪽을 바라다보고 그 오른쪽에 보이는 누각은
당시 보기 드문 이층 누각이었던 숭례문임에 틀림없습니다.
산수화 속에 숭례문이 그려진 것은 아마도 이 작품이 유일할 듯합니다.
겸재에게 그림을 배웠다는 현재 심사정 그림에도 비슷한 구도로 한양 성내를 그린 것이 있습니다만, 숭례문은 보이지 않습니다.
심사정沈師正 <망도성도望都城圖> 1768 지본담채(紙本淡彩) 13.5x24cm
《경구팔경첩(京口八景帖)》의 한 점인 도성을 바라보는 그림 <망도성도>는
위아래로 긴 직사각형 구도지만, 인왕산에서 한양을 내려다 본 비슷한 시점의 그림입니다.
여기에도 왼편에 남산자락과, 멀리 관악산이 보이는데,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이 듭니다.
그림에 붙은 강세황의 발문을 보면
“깎은 절벽 높은 산마루는 구름하늘을 높이 받치고
장송은 유촌을 가리어 어른거리는데
여기에 천외의 기봉이 우뚝 서서 푸른 병풍을 치듯 하였으니
화품은 그만두고 어찌 이런 풍경이 왕성 근처에 있는 것일까”
라고 하며 감탄하고 있습니다. 필운대를 못 알아볼리는 없을 텐데 말이죠.
참고로 정선의 또다른 필운대 그림을 보겠습니다. 한양을 내려다본 위의 그림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지요.
위에서 바위를 내려다본듯한 독특한 구성으로 생동감 있는 또다른 매력이 있는 그림입니다.
날씨가 풀리는대로, 종로도서관에서 책도 보고 필운대에서 봄을 즐기며 몸과 마음에 건강한 기운을 불어넣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