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서, <진단타려도(陳摶墮驢圖, 나귀에서 떨어지는 진단)>, 1715(숙종41), 비단에 채색, 110.9x69.1cm
길 위에 세 사람이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이는 흰 나귀를 타고 가다가 엎어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수행 동자인 듯 작은 아이가 깜짝 놀라 달려가고 있고, 길 가던 나그네도 놀라 쳐다봅니다.
옛 그림에서 보기 드문 다이내믹한 장면 아닌가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귀에서 떨어지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합니다.
혹시 살짝... 그런 사람일까요? 화가는 왜 이런 장면을 연출한 것일까요?
이야기책 속 한 장면인 듯한 이 그림은 공재 윤두서의 <진단타려도(陳摶墮驢圖)>입니다.
제목에서 ‘진단’은 사람 이름이고 ‘타려’는 나귀에서 떨어진다(떨어질 타墮 나귀 려驢)는 뜻이므로,
‘나귀에서 떨어지는 진단 선생’ 그림이라는 의미입니다.
희이 진단(希夷 陳摶, ?~989)은 10세기 무렵 중국에서 활동한 도사님입니다.
여러 도술에 능통해 당시 어지러운 정치 상황에서 여러 왕과 황제가 그를 쓰려 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은거하며 110살이 넘도록 살았다고 합니다.
도술이 신선의 경지에 올라서 송나라 태종이 ‘심오한 도리를 깨진 이’라는 뜻으로 ‘희이’라는 호를 내려준 것이라고 하네요.
어느 날 선생이 흰 나귀를 타고 하남성으로 가던 길에, 지나가는 행인에게서
'조광윤이란 인물이 송나라를 세우고 태조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답니다.
선생은 평소에 조광윤을 인재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 얘기를 듣고 기쁜 나머지 안장에서 떨어졌는데,
떨어지면서도 크게 즐거워하며 “천하는 이제 안정되리라!”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림상 왼쪽의 행인은 그 소식을 전해 준 이겠지요.
그 행인도 나귀에서 떨어지는 사람을 지켜보는 사람치고는 표정이 평안하네요.
이 그림을 감상할 때는 나무와 바위의 채색, 구도 등 다양한 형식들도 살펴보고,
윤두서가 말의 묘사에 한 경지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던가,
잘 알려진 윤두서 자화상의 얼굴과 희이 선생의 얼굴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을 듯합니다.
또 하나, 작품 왼쪽 위에 보이는 숙종의 제시(題詩)를 보고 넘어가야겠습니다.
“希夷何事忽鞍徙 (희이하사홀안사)
非醉非眠別有喜 (비취비면별유희)
夾馬徵祥眞主出 (협마징상진주출)
從今天下可無悝 (종금천하가무리)
歲在乙未伸秋上浣題 (세재을미신상완제)
희이선생 무슨 일로 갑자기 안장에서 떨어졌나
취함도 아니요 졸음도 아니니 따로 기쁨이 있었다네
협마영에 상서로움 드러나 참된 임금 나왔으니
이제부터 온 천하에 근심 걱정 없으리라
을미년 8월 상순에 쓰다“
나귀에서 떨어질 만큼 기쁘게 받아들일, 그런 군주가 되고 싶은 것이 숙종 임금의 마음이었을까요?
윤두서가 화사한 청록 색상을 쓴 것도, 화면 상단의 길이 아스라이 펼쳐지는 것도
마찬가지로 평화롭고 밝은 미래를 위한 바람 때문이고 말이지요.
사실 예술의 후원자로서 왕의 취향도 그림에 어느 정도는 반영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숙종의 글이 포함된 그림 7점 중 5점이 청록화풍으로 채색되었다고 하니까요.
- 더 읽어볼 책
오주석,『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솔, 2005.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테마전-왕의 글이 있는 그림』도록,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