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이병연
김창흡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사천 이병연(1671~1751)과 그의 친구 겸재 정선(1676~1759)입니다.
이병연의 집안은 노론이었지만 같은 한산 이씨 집안 중 아계 이산해는 동인-북인이었습니다. 아계의 삼촌 이지무(이지함의 형)의 집안은 노론이 되어 이산보 등으로 이어집니다.
한산 이씨 노론계는 서대문 천연동 쪽에 살았고, 사천 쪽과 가까운 단릉 이윤영 등도 서대문 영천동 금화초등학교 근처에 살았습니다. 그 동네가 한산 이씨 집성촌 같았다면 그 길 건너에는 이광사네 집안, 즉 전주 이씨 덕천군파가 모여 살았습니다. 현저동 냉천동은 한산 이씨, 서대문 물길 건너 송월동 서울 교육청 자리는 전주 이씨들이 있었던 것이죠.
사천 이병연의 집은 현 청와대 서쪽 궁정동 언저리에 있었던 듯합니다. 삼연 김창흡은 누상동-옥인동 쪽이니 이병연은 김창흡과 한 동네에서 지냈다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김창흡도 그랬지만 이병연이야말로 문장과 시로 유명했습니다. 사천이 삼연의 영향을 많이 받아 제자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병연의 글씨는 오종종하다고 할까, 그렇게 잘 쓴다는 평을 받지 못했습니다. 강약이 너무 심하거나 수전증 있는 듯이 떨리기도 합니다.
정선 <인곡정사도>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중. 종이에 먹, 22×32.3㎝ 보물 585호 개인
이병연이 쓴 인곡정사도의 제시 부분
松翠之邊竹籟中 소나무 푸른 주변 댓파람 소리 가운데
揮毫草草應兒童 거침없이 붓 휘둘러 아이를 응대하네
輞川不是他人畵 망천을 그린 것은 타인의 그림이 아니라
畵是主人摩詰翁 바로 그림의 주인은 마힐옹(왕유)로구나
丙寅秋友人槿老 병자년 가을 친우 근로(이병연)
김창흡의 글씨는 덕이 있고 널찍한 것이 좋았는데, 아랫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결과를 보이는 것은 의아한 일입니다.
이인상의 글씨가 다소 펑퍼짐해서 삼연의 영향으로 볼 수 있고, 김종후, 김종수, 심한지의 글씨가 삼연의 글씨와 가장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골수 노론인 손자뻘 장동 김씨 중에서 삼연의 글씨를 쓴 사람들이 조금 있습니다.
심환지 간찰 글씨
겸재 정선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은 매우 친밀하여 이병연의 시를 주제로 겸재가 그림을 그리는 등의 교유 증거가 많이 남아 있지요. 겸재가 사천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전해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1740년~1741년, 양천 현령으로 가게 된 겸재가 그림을 보내고 이에 화답하는 사천 이병연이 시를 쓴 것을 첩으로 묶은 것이 유명한 《경교명승첩》이지요. 여기서 사천의 글씨와 둘의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겸재 정선 그림, 사천 이병연 글씨 <종해청조(宗海廳潮)>《경교명승첩》1740, 비단에 채색, 29.2x23.0cm, 간송미술관
양반가이지만 몇 대째 벼슬을 못해 별 것 없게 된 집안에서 태어났던 겸재는 딱히 당색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어릴 때 김창집이 도화서 화원으로 천거하기도 하고 노론 장동 김씨 집안에서 그를 강력히 뒷받침해 주었으니 노론 배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자인 심사정도 그 영향력 안에 있었을 것입니다.
조영석이 겸재에 대해 남긴 기록을 보면 "어려서부터 한양 서울의 북쪽 동네 순화방 백악산 밑에서 살았고, 나 역시 순화방에서 대대로 살며, 공보다 열 살이나 어리니 내가 죽마탈 때 공은 엄연히 관례를 치른 어른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항상 공경하여 일찍이 너나들이를 한 적이 없다.“라고 하여, 명문가 조영석과 거의 직업적 화가와 마찬가지였던 정선의 관계를 오히려 짐작하게 해 줍니다.
사천의 친구 겸재 또한 글씨는 그저 그렇고, 그래서인지 수많은 그의 그림 중에 화제를 쓴 것은 거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관지나 제목을 쓴 정도인데 그나마도 그다지 훌륭하지 않습니다. 연습은 분명 많이 했을 것 같은데 그에게는 글씨의 감각은 없었나 봅니다.
문예계의 유명 인물이자 주요 화가이기도 한 사람들 중에서 표암 강세황이나 자하 신위 정도가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여겨지고 많은 화가들이 글씨에서는 약점을 보입니다. 현재 심사정이 글씨를 괜찮게 썼고, 단원 김홍도는 그리 뛰어나지는 않지만 활달하고 화가들 중에는 좀 나은 편입니다.
이인문 또한 한문으로 글을 짓지 못하여 남긴 글씨가 ‘고송유수관도인’ 관지 정도이며 본인이 쓴 화제도 거의 없습니다. 이인문 외에도 장승업, 조석진 등은 글을 잘 못 썼던 사람들이니 자연히 글씨를 쓰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