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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김씨의 글씨
광산 김씨 중 많은 사람들이 안동 김씨나 여흥 민씨 등 노론 중심세력과 비슷한 글씨 양상으로 몇몇만이 글씨를 잘 쓴다고 할 만합니다. 안동 김씨 중에는 김상용(金尙容, 1561~1637),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잘 썼고, 여흥 민씨 중에 민정중(閔鼎重, 1628~1692),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의 글씨가 좋습니다. 


곡운 김수증 <고산구곡담기高山九曲潭記> 국립중앙박물관
율곡 이이가 머물렀던 황해도 지역을 간이 최립이 주자의 무이구곡처럼 묘사해 지은 <고산구곡담기>를 김수증이 예서체로 썼다. 



김수증 <次諸公韻奉呈> 1686년



민진원 서간



김상용 전서대련 119.5x37.8cm


또 광산 김씨에서 글씨 잘 쓰는 사람으로 신독재 김집이 있고, 김진상, 김진규 글씨가 약간 독특하고 눈에 띕니다.  광산김씨 김두열도 전서를 잘 썼습니다. 뭐니뭐니해도 그 당시에 글씨로 유명한 광산 김씨는 배와(坯窩) 김상숙(金相肅, 1717~1792)입니다. 

그에 대해서 『근역서화징』에 “본관은 청풍(淸風)” 이라고 되어 있지만 청풍 김씨가 아니라 광산 김씨입니다. 『근역서화징』 김상숙 부분에는 “죽천 김진규(金鎭圭, 1658~1716)의 종손이며 우의정 김상복(金相福, 1714~1782)의 아우”라고 되어 있고 이들 모두 광산 김씨 족보에 들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 서화가들에 대해 찾을 때 바이블처럼 여기는 역대 서화가 사전인 『근역서화징』은 사실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지난 번 언급했듯 백하 윤순이 조윤형(曺允亨)의 장인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계속 전해지는데, 『근역서화징』에 잘못 기록되어 있는 탓이 큽니다. 

“자는 치행, 시중, 호는 송하옹, 본관은 창녕, 담운재 조명교의 아들이며 백하 윤순의 사위. 영조 원년 을사(1725)생, 음관으로 벼슬은 지돈녕부사.” (『근역서화징』 “조윤형” )

조윤형의 아내는 전주 이씨였으니 그가 백하 윤순의 사위일 수는 없지요.

김상숙과 황운조
김상숙은 성격이 화통했다고는 하지만 동시기 다른 인물들에 비해 삶이 오르락내리락하지 않고 평탄하며 잘 움직이지도 않아서 벼슬도 높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인상, 강세황, 이광사와 동시대 인물입니다.) 

대개의 평가로는 그가 조금 열심히 했다면 높은 벼슬을 할 수 있었는데 자신이 그러한 길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것이라 합니다. 그는 노자, 주역, 논어에 통달했고 성대중의 평가에 비춰보면 글씨가 굉장히 단정함을 알 수 있습니다. 

“행서와 초서의 큰 두루마리 두 개를 나에게 주셨는데 글자획의 신기하고 건장함은 공 스스로도 옛날보다 낫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러나 공의 글씨의 아름다움은 그 실상이 글자획의 밖에 있어서 은연히 그 안에 쌓인 것이 새어 나가서 담연히 그 반대편으로 나타나니...평탄하고 깨끗하고 시원하여 가까이 볼수록 더욱 멀어 보이니...”(성대중, 『청성집』)

김상숙 글씨의 연원은 중국 왕희지보다 더 이전 사람인 종요(鍾繇, 151~230)의 글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김상숙의 대표 글씨체가 종요체입니다. 한나라 예서에서 나온 초서인 ‘장초(章草)’라는 글씨에서 종요체가 나왔는데, 아주 둥글둥글하고 예쁩니다. 한나라 때 종이가 발명되면서 이 글씨는 비석글씨가 아니라 종이 글씨여서 동글동글한 성질을 더 잘 살려주었는지도 모릅니다. 



김상숙 <죽장첩> 부분


종요체는 이광사가 조금 쓰기는 했지만 배와만큼 평생 종요체를 탐구한 사람은 없으며, 종요체를 수용한 조선의 유일한 서예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상숙이 쓴 『주역』을 한 권 가지고 있는데 마치 인쇄한 글씨 같습니다. 


종요의 글씨


서울의 사직동에 살았기 때문에 개성있는 그의 서체를 사직체라고도 합니다. 해서, 행서, 초서를 잘 쓰지만 특히 행서에 장점이 있습니다. 

김상숙의 형 김상복(金相福, 1714-1782)은 벼슬이 영의정까지 이르렀던 사람으로 그의 이름을 의외의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회화대관』에 나오는 그림의 수장가로서입니다. ‘김상복 구장(舊藏)’ 이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를 지낸 어학자 김선기(1907-1992) 박사가 김상복의 직계 자손입니다.) 김상복 구장 그림 중에 잘 알려진 것으로 겸재 정선이 금강산 정양사를 그린 부채그림이 있습니다.



『회화대관』에 실린 정선의 정양사 부채 그림. 김상복 구장


배와 김상숙은 형에게 깍듯하고 우애도 좋았습니다. 형에게 보낸 편지도 많이 남아 있는데 이들은 글씨도 비슷합니다. 형인 김상복이 찬하고 동생 김상숙이 글씨를 쓴 비문도 남아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 비문도 그렇게 형이 찬하고 동생이 썼습니다. 형님이 그림을 모으는 데에 동생이 어느 정도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김상숙은 선산이 있는 홍성 근처에 내려가 사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지만 사직동 밑에 살면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렸고, 사람이 좋아 중인들과도 친하게 지냈습니다. 배와 김상숙과 친했던 도곡 황운조(道谷 黃運祚, 1730-1800)는 강화에 살면서 왔다갔다 하며 지냈습니다. 이분도 벼슬은 별로 하지 못했습니다만 황운조가 연기군수로 있을 때 충청병사 이광섭이 초대한 연회에 당시 연풍현감으로 있던 김홍도가 초대받아 그림과 글씨로 친교한 적도 있고, 정조의 명으로 만들어진 용주사 소장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佛說大報父母恩重經版)에 변상도는 김홍도가 밑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글씨는 황운조가 쓰기도 했습니다. 


황운조 글씨 23.5x30cm 오세창 구장품, 개인


황운조의 글씨는 김상숙과 약간 달라서 왕희지 계통에 가까운데 당시 정조의 명으로 간행된 『춘추좌전』의 큰 글씨를 조윤형과 함께 썼습니다. 이규상은 ‘황운조는 해서를 잘 썼는데 획이 매섭고 법이 정연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조윤형과 황운조, 김상숙 세 사람은 벼슬도 높지 않고 글씨를 좋아하기도 해서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글씨체는 다릅니다. 조윤형은 이광사, 윤순 쪽의 변형이고 우리 글씨를 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에 비해 황운조와 김상숙은 독창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살던 시기, 강세황(1713-1791)과 최북(1712-1760) 등도 연배가 비슷했는데 어울린 기록이 없는 것은 조금 의외입니다. 

김상숙의 아들 김기서(큰아버지 김상복의 양자로 들어감) 또한 글씨를 상당히 잘 썼다고 합니다. 김기서가 그린 단발령 그림 이외에, 이인상이 그린 그림을 김기서가 임모한 먹의 도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기서 <단발령> 간송미술관
그는 집안 별장이 있던 홍성의 한 지명 '이호梨湖'를 호로 썼는데 아마도 관지의 '이오梨塢'도 같은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글씨는 아버지의 것과 매우 비슷하다. 


김기서는 나걸(羅杰)의 아들들과 친했습니다. 당시 박지원, 성대중 등과 친밀하게 지냈던 나열(羅烈), 나걸 형제 중에는 나걸이 특히 글씨를 잘 썼습니다. 나걸이라는 사람은 서예 이론인 ‘필결’을 남기기도 했어요. 추사 이전에 서예 이론을 남긴 이는 옥동 이서, 이광사에 이어 김상숙이나 나걸 정도만 있는 셈입니다. 

김기서는 본인이 서화를 하기도 했지만 상당한 수장가이기도 했다고 하는데, 김상복의 서화 수장품이 양자 김기서에게로 전해진 거 아닐까 추정이 됩니다. 
SmartK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1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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