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등장했던 이인상의 절친, 동춘당의 5대 후손 송문흠은 이인상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었지만 이인상 못지 않은 좋은 글씨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인상과 다른 점은, 이인상은 자존심이 몹시 강했던 사람이었는지라 남아 있는 작품들 중 태작이 별로 없고 완성도가 다 높은 데 비해, 송문흠은 전해지는 글씨들 간에 갭이 있어서 다소 완성도 떨어지는 글씨가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잘 썼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글씨 편차가 크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이윤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윤영의 그림은 이인상의 것과 구별이 안 되지만 두 사람의 글씨는 구별이 쉽습니다.
이인상-송문흠-이윤영 세 사람의 진한 우정을 신교(神交)라고 했는데, 조선시대에 이들과 비교될 만한 우정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기의 이항복-이덕형, 율곡 이이-우계 성혼-구봉 송익필, 학산 유최진-석경 이기복, 말기의 전기-유재소 등입니다. 학문과 철학과 특별한 우정을 나누던, 요즘 말하는 브로맨스 관계는 특히 중인들 사이에 많았다고 합니다.
이인상과 친구들을 단호 그룹이라고 부르는데, 이윤영, 송문흠, 오찬, 윤면동, 김순택, 김무택이 그에 속합니다. 서울대 박희병 교수가 이인상의 모든 것을 연보 식으로 정리한 『능호관 이인상 연보』 가 올해(2022년 4월) 출간되었는데, 여기에 그 단호 그룹의 활동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인상, 초서 서간, 29.1x38.0cm, 개인
이광사 글씨와의 비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와 이인상의 글씨를 함께 놓고 보면 어떤 차이가 보일까요. 이광사의 글씨는 강하고 울분이 있습니다. 이인상도 비슷할 것 같지만, 서출이라는 굴레가 있어 억울한 인생이었을 테고 한 성깔 했을 것 같은데도 글씨 자체에서는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고 환골탈태해서 부드럽습니다. 철심은 들어있으나 드러나지는 않는다고 할까. 이에 비해 이광사나 조윤형 글씨에서는 뭔가 울분이 드러나고, 강하고, 생경하고, 과한 힘에 의해 비뚤비뚤해지기도 합니다. 이인상의 경우 자존심이 세서 그러한 강한 감정조차 죽이고 드러내지 않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광사, 행서 고시 8곡병, 각 77.4x36.8cm, 개인
이광사, 행서 사언시(四言詩), 66x105cm, 서울대학교박물관
23년 간의 귀양살이 아픔이 묻어나는 이광사의 글씨는 많이 보면 조금 물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인상의 글씨는 보면 볼수록 맛이 느껴집니다. 이인상의 글씨에 빠지면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고들 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그는 서화의 경지를 어느 정도 올린, 자신의 영역을 쌓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사도 미처 다 빼지 못한 것을 이인상은 다 제거하고 환원된 글씨라고 할까요. 추사마저도 이인상의 부드러움을 갖추지 못합니다.
연안 이씨 중 이민보(李敏輔, 1720~1799)의 글씨가 이인상의 것과 비슷한 면이 있는데 이들을 비교해 보는 것도 이인상의 글씨 특징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이인상의 후배들 중 유한지와 이한진 등도 전서와 예서를 잘 썼다고 하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이인상의 전서가 더 낫다고 봅니다.
이한진, 전서 相鶴經, 22.5x39cm, 서울대학교박물관
유한지, 예서, 12.5x20cm, 개인
이인상 그룹, 홍대용-박지원 그룹, 추사 그룹, 표암 그룹 글씨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점이 많이 발견됩니다. 이인상 그룹은 글씨가 비슷하지만 이에 반해 박지원 그룹은 글씨가 모두 다릅니다. 이후에 박지원 그룹의 글씨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보다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이들 그룹별로 글씨를 비교하는 전시 같은 것이 있으면 조선시대 서예에 대하여 잘 모르는 이들도 글씨를 감상하고 구별하는 시각이 조금 더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인상은 지리산 근처인 경상도의 사근도(沙斤道) 찰방(察訪, 종6품 관원)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후에 이덕무(1741~1793) 또한 사근도 찰방으로 가게 됐는데, 거기에 전해 내려오는 이인상 얘기가 하도 많아서 그 이야기를 정리했다고 합니다. 당시 사근역(沙斤驛)에 이인상이 지은 서재 이름이 한죽당(寒竹堂)인데, 이덕무가 그곳에서 영남지방의 명승·고적·고금인물·풍속 등을 수집해 기록한 책이 바로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문집으로 묶인 곳에는 일부만 전해지고 이인상에 대한 내용 같은 것들은 누락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덕무의 글씨가 독특한데, 생각해 보면 이인상의 영향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덕무, 행서 서간, 1772년, 20x47cm, 성균관대학교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