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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상과 친구들 - 이윤영, 송문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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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 이인상은 주변의 선비 친구들과 진한 우정을 나눴습니다. 친구들은 이인상을 좋아하고 존경했는데, 능호집의 발문을 적은 김종수(金鍾秀)는 “이원령(이인상)은 기이한 선비이다. 비쩍 마르고 목이 길고 수염과 눈썹은 적고 얼굴에는 기미가 잔뜩 끼었다. 매양 산보하면서 소리 높여 시를 읊조리매 멀리서 바라보면 그 모습이 마치 학과도 같았다. 천성이 소탈하고 욕심이 없고 산수와 문장과 술을 즐겼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행동을 제어함이 반드시 옛 뜻에 근거를 두어서 비록 나무라고 헐뜯는 자가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가 이 때문에 원령을 대단히 존경했다. 그런데 저 세상에 남의 말만 듣고 명성을 따르는 자는 다만 그 문장과 전서와 그림의 아름다움만을 볼 뿐이니 어찌 족히 원령을 안다고 하겠는가.”라 했습니다.

이윤영은 시문을 인용해 “봄 숲의 외로운 꽃, 가을 밭의 선명한 백로로다”라는 발문을 적어 친구의 이미지를 아름답게 표현한 바도 있습니다. 이윤영은 한때 서대문 천연동 옆 연못 있는 곳에 거주했고, 이때 친구들이 놀러와서 그림을 여러 장 남겼습니다. 천연정 모임을 서지아회로 부르면서 우아한 시회를 열고, 시를 짓고 그 분위기를 그림으로 그렸는데 아회도는 유행처럼 많이 그려졌습니다. 


이인상, <서지백련西池白蓮> 1745, 종이에 수묵담채, 51.5x26.0cm, 간송미술관
이윤영이 그린 초본 위에 이인상이 그림을 완성했다. "서쪽 연못에서 이윤영이 초(草)낸 바를 취하여 백련을 그리니 먹 씀이 지나치게 엷어서 꽃과 물을 구분할 수 없다. 드디어 색먹으로 우림을 행하고 송문흠의 부용연지명을 옮겨 적어 주인에게 보이며 한 번 웃노라. 을축년(1745) 가을날. 보산인 인상."



이윤영 녹애정(綠靄亭) 종이에 담채, 34.6×55.2㎝, 간송미술관



1751년, 이윤영, 김종수, 이인상이 사인암을 유람하고 옛 글을 집구하여 시를 쓰고 이를 암벽에 새긴 것이 남아 있다.
'繩直準平 玉色金聲 仰之彌高 魏平無名 辛未春 胤之 定夫 元靈 撰'
'먹줄을 튕긴 듯 곧고 평평하여 옥빛 쇠소리 어울리네. 우러러 보니 더욱 높아지는데 빼어난 벽에 이름이 없구나. 신미년(1751년 영조 27) 봄 윤지(이윤영), 정부(김종수), 원령(이인상)이 짓다'


친구들이 이렇게 쉽게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사는 곳이 멀지 않았던 것도 있겠지요. 김종후, 김종수 형제는 사직동 언저리에 살았던 것 같고, 이인상은 이윤영이 사준 남산 근처의 집에 거주했습니다. 천연동 연못 서지는 현재 서대문 금화초등학교 자리 근처입니다. 근처에 애오개 쪽 넘어가는 고개 둥구재에 원교 이광사도 살았습니다.(지금 추계예대 뒷산 근처 동네와 미근동에 전주 이씨 적성공파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조금 더 내려가 용강동에는 덕천군파가 많이 살았는데 요쪽은 강이 가까워 배 타고 다니가 좋은 장점이 있었습니다.) 동래 정씨 등의 소론은 회현동에 많이 살아서 동래 정씨를 회현 정씨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인상도 그 뒤 어디쯤에 살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친구들과 진한 우정을 나눴던 이인상이지만 노론이 아니면 만나는 일이 없었던 듯합니다. 남인이 살던 동네는 지나가지도 않았다고도 합니다. 비슷한 시기 문예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표암 강세황은 소북(북인)으로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과 다 어울렸는데, 그가 만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이인상입니다. 그 말 많은 양반이 이인상에 대해서는 남긴 말조차 없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강세황과 이인상은 특이하게도 전혀 만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표암 강세황 1713년생, 이인상 1710년생, 이광사, 심사정 1707년생, 다들 또래인데, 강세황과 달리 이광사나 심사정은 이인상과 소통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심사정의 집은 천연정 뒤쪽이었고 그는 노론 사람들과 많이 어울려 지냈으니 만났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인상은 김창협을 존경했고, 그쪽 라인인 이병연(1671-1751)과는 만나보고자 하지 않았을까도 추정해 봅니다. 이병연 친구인 겸재 정선(1676-1759)도 여기 얽힐 만한데, 이인상이 겸재와 소통이 있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이인상은 역시 그의 그림만큼이나 독특한 사람이었던 듯. 혼자 화보, 탁본, 체본을 보고 공부했습니다. 글씨와 그림의 느낌이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기도 해서 대표작인 <설송도>를 보면 글씨와 그림, 시가 일체가 되었음을 느낍니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성격이 보통이 아닌 듯 한데, 전해지는 일화들도 꼬장꼬장한 성격을 보여줍니다. 이인상의 글씨 속에는 ‘철골이 들어있다, 철색이 들어 있다’고도 말합니다. 부드러운데 철심이 들어있는 것처럼 묘한 강골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나무, 파도, 바위 등을 그릴 때의 선, 특히 준법에서 예서나 전서 같은 특징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인상 <설송도> 종이에 먹, 117.3x52.6cm, 국립중앙박물관


이인상의 절친 중 절친인 한정당 송문흠과 이윤영은 이인상에 가려져 안타깝게도 서화의 역사에서 그들이 별도로 이야기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이윤영 獨立不懼 遁世無憫 (단양 사인암 글씨 탁본)
홀로 서있어도 두려울 것이 없고 / 세상에 은둔하여도 근심할 것이 없다


동춘당 송준길의 5대 후손 송문흠을 다시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그는 동춘당의 영향으로 전해지는 글씨들이 모두 좋고 미려합니다.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일찍 (43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서를 잘 썼고, 그에 대해 『병세재언록』은 ‘팔분서와 전서를 잘 썼는데 팔분서는 굳세고 아름다워 근세의 으뜸이라 할 만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생인 송명흠(宋明欽)은 해서가 좋습니다. 


송문흠, 예서 두보시 고백행 일부, 26x52.5cm 오세창 구장
大夏如傾要梁棟 萬牛回首丘山重 不露文章世已驚 未辭翦伐誰能送 文欽
큰 집 무너지려할 대 대들보 필요하거니와
만 마리 소 고개 젓듯 산처럼 무겁구나
훌륭한 모습 들어내지 않아도 세상 이미 놀랐거니와
베어내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해도 누가 운반하랴. 문흠


이인상의 서체는 몇몇 노론 골수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인상, 송문흠, 송명흠, 김종수, 김명수 다섯 사람의 해서가 특히 다 비슷하고, 여기에 더해 정조의 정적으로 주로 등장하는 노론 벽파의 중심 심환지(1730-1802)의 글씨도 유사합니다. 그의 글씨에서 이인상의 영향이 확실히 보입니다. 









SmartK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0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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