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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론의 글씨 (4) 조윤형, 서무수, 서명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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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형(曺允亨, 1725-1799)
백하 윤순의 제자 이광사, 그리고 그 이광사를 제자 조윤형이 이어갔습니다. 다만 이광사의 글씨보다 조윤형의 글씨가 좀더 윤 백하의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무엇 때문인지 조윤형이 백하 윤순의 사위라고 전해지기도 했었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이광사는 스승으로부터 해서 정도만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고 행서와 초서는 전혀 다른 그만의 글씨를 보여주는데 조윤형의 글씨는 이광사보다는 힘을 조금 덜 준다고 할까, 나긋나긋한 느낌을 좀더 가지고 있어 힘있는 이광사와 유연한 윤 백하의 중간 정도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조윤형 <난정시蘭亭詩(손작孫綽 시)> 21.7x11.7cm 화정박물관


조윤형 <백사도白沙渡(두보 시)> 각 83x51cm 개인


백하 윤순의 글씨


원교 이광사의 글씨


물론 조윤형의 글씨 중에는 이광사의 것과 비슷한 것이 많은데, 조형 면에서 이광사보다 조윤형이 더 낫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광사는 전체적으로 짜맞춰진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반면 조윤형은 조금 더 과감하게 벗어나는 경우들이 보입니다. 획은 조윤형에게서 조금 가늘고 연약해집니다. 

조윤형에게는 정부인에게서 아들이 없고 서자만 있었습니다. 조윤형은 서녀인 딸을 자하 신위에게 시집 보내 그의 첫째 부인이 됩니다. 자하 신위도 첫째 부인에게서 아들이 없고 서자들이 있었는데 아들 셋을 적자로 바꾸어주기도 했습니다. 

조윤형은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합니다. 김광국의 <석농화원>에 그의 그림에 대한 평이 있습니다. 

“그림에 능한 자가 글씨 잘 쓰지 못하나, 글씨 잘 쓰는 자는 이따금 그림을 잘 그리기도 하는데, 혹시 글씨를 통해 그림을 깨우치기가 쉽고 그림으로부터 글씨를 깨우치기는 어려운 때문인가? 조윤형 시중씨도 글씨로 이름이 있었는데, 글씨를 쓰는 여가에 장난으로 그림을 그리면 자못 볼 만한 작품이 있었으니, 이로써 더욱 내 말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할 수 있었다. 우연히 조윤형의 <이마도二馬圖>를 보고 화제를 쓴다. - 『석농화원 』

김광국이 자신의 생각을 쓴 것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중에 글씨 못 쓰는 경우는 많지만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대개 그림도 잘 그립니다.

조윤형의 증손자인 동곡 조인승(1842-1896)은 구한말 사람으로, 그 시대에 동기창체를 가장 잘 쓰는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조씨 무둔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씨들에게는 글씨 못 쓰는 이가 없다는 뜻이지요. 


수헌 서무수(徐懋修 1716-1785?), 소고 서명균(徐命均, 1680-1745)
윤순의 제1 제자가 이광사라면 그 다음 제자로 수헌 서무수가 있습니다. 달성 서씨 집안은 결혼 등 여러 가지 환경 때문에 노론과 소론이 섞여 있으며 서무수의 집안은 그중 소론에 해당합니다. 서무수의 할아버지는 영의정, 서무수의 아버지 서명균은 좌의정에 올랐고, 형 서지수도 영의정을 지내서 삼대에 이어 정승을 배출한 명문 집안입니다. 서무수의 글씨는 시장에 많이 유통되지 않아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만, 해서의 경우 그의 선생을 많이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초서에서는 그 영향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글씨가 이광사보다 많이 둔탁하고 예술가로서의 기질은 적습니다. 오히려 서무수의 아버지 소고 서명균의 글씨가 높게 평가될 때가 많습니다. 

『근역서화징』의 서명균 조에 보면 이광사가 『소고비서첩』에 달았다는 발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소고 서상국(서명균)은 평생 초서를 쓰지 않고 비록 보통 하는 편지라도 모두 해자로 썼으므로 이 때문에 비판(碑板)의 글씨를 쓸 적에도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았고 글씨를 써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써 주곤 했다. 그런데 백하(윤순)는 해서와 초서를 가리지 않고 모든 비문의 글자를 반드시 정성을 다해 써서 비록 수백 자밖에 안 되는 비석 하나도 한번 쓰려면 2, 3개월이 걸리곤 했다. 그리하여 글씨 써 달라는 자들이 대단히 어렵게 여겨서 소고공(서명균)에게 많이 찾아갔으니, 이것은 그의 서법이 백하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다. 소고공은 글씨획이 나약하고 늘어진 게 많아서 글자 매조짐새가 확실하지 못했으니, 이는 실상 한단(邯鄲)에서 걸음마를 배우는 격(남의 재주를 배우려다가 제가 가지고 있던 재주까지 잊어버린다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그 질박하고 고고한 태도에다가 곱고 고운 자태를 겸하는 것은 반드시 백하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데 비록 백하라고 해도 또한 스스로 따라갈 수가 없다고 했다. 요컨대 우리나라의 글씨 쓰는 사람 가운데 명필의 자리에서 빼놓을 수는 없으니, 백세 뒤에 안목 있는 자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다.”  -『근역서화징』


이와 관련해서 우연히 지방 어느 고서점에 들렀다가 겪은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서가에서 오래된 글씨 첩을 하나 꺼내 보니 제첨이 『학록필첩(鶴鹿筆帖)』으로 되어 있는데, 학록이 어떤 사람의 호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흥정이 어려울까봐 자세히 보지는 못하고 슬쩍 안을 보니 백하나 원교의 글씨와 비슷한 듯해서 자세히 보지 않고 적당한 값을 내고 일단 구입했습니다. 관지도 없고 내용도 당시(唐詩)를 쓴 것이라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는데, 서울로 오는 기차 속에서 이 첩을 자세히 살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맨 뒤에 원교 이광사의 약간 큰 글씨와 아주 작은 글씨의 발문이 있고, 그 내용으로 보아 이 첩의 내용은 소고 서명균의 글씨였기 때문입니다. 원교의 발문은 위 『근역서화징』 ‘서명균’ 조에 실려 있는 내용이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근역서화징』에는 발췌하여 실려 있었으나 첩에는 전문이 다 있었습니다. 소고의 글씨가 백하나 원교와 비슷한 것에도 놀랐고, 이 첩이 위창 오세창이 『근역서화징』에서 인용한 바로 그 첩이라는 점에 놀랐고, 서명균은 백하의 제자인 수헌 서무수의 아버지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윤사국(尹師國, 1728-1809)
한 사람만 더 추가해 볼까요? 『근역서화징』에 “백하와 원교가 모두 칭찬했다”고 언급된 인물이 있는데, 윤사국이라는 사람입니다. 
"공이 서예에 있어 재주가 대단히 높았다. 그가 어렸을 때 상국(相國) 서명균(徐命均)이 글씨 한 첩을 쓰고 그 절반은 빈 채로 남겨두고 주면서 '자네가 스스로 쓸 때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백하 윤순과 원교 이광사가 모두 글자를 써주며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하였고 뒤에 유명한 서예가가 되었다." -『근역서화징』

윤사국은 금강산에 있는 유명한 ‘묘길상’ 세 글자를 쓴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백하의 글씨에 비해 글씨가 퍼지지 않고 짝 달라붙는 느낌이 듭니다. 


이들의 뿌리에 백하 윤순의 글씨가 있습니다. 조선 후기 들어 대부분의 선비들이 왕희지(王羲之)나 동기창(董其昌) 글씨 위주로 공부하였지만 윤 백하는 문징명(文徵明)의 글씨를 모범으로 썼기 때문에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추사 김정희는 백하의 글씨에 대해 “문징명이 작은 해서로 쓴 적벽부(赤壁賦) 탁본첩으로 백하가 오로지 공부하였으니, 그 내려긋는 획은 짧고 위는 두툼하고 아래는 홀쭉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가 얻은 법이다”라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SmartK 관리자
업데이트 2024.05.19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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