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하 윤순(1680-1741)
윤 백하는 글씨뿐만 아니라 글도 잘 짓고 성격도 활달했다고 전해지며, 소송 같은 긴 문서들을 슥 보고 외워 옮겨 적고 몇 십 건 처결을 바로바로 내렸다는 일화도 있는 만큼 머리도 좋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집안도 좋고 스스로 직책도 높았습니다. 대제학, 요즘으로 치자면 서울대 총장에 문화부 장관을 합친 것과 맞먹는 직책과 평안감사 등 여러 요직을 지냈습니다. 특히 대제학은 영의정 세 개와 대제학 하나가 같다 할 정도로 선비들의 존숭을 받는 자리입니다. 윤순의 형 윤유(尹游) 또한 글씨를 잘 썼고 육판서를 다 하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 말이 나와서 살짝 이야기해 보자면 8도의 감사(관찰사)를 다 하는 것을 또 명예로 쳐서 ‘8감사’로 부르며 자랑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6곳의 감사를 했으면 6감사, 이렇게 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를 하게 되면 임금이 유서(諭書)라는 것을 내려줍니다. 유서는 일종의 공문서로 왕이 지방에 있는 관찰사, 절도사 등 군사권을 위임받은 관원에게 내리는 명령서입니다. 관찰사가 병사를 겸하게 되어 받은 6도의 유서를 귀하게 첩으로(유서첩) 만들어 가보로 전하고 있는 집안도 있습니다.
백하 윤순의 글씨
윤 백하의 글씨는 획 삐침에 강약이 있으면서도 예쁜 글씨라 할 수 있습니다. 이광사의 각지고 강인한 글씨에 비해 스승 윤 백하의 글씨는 부드러우며 둥근 맛이 있습니다. 이쁜 색시 같다고나 할까, 유연하고도 날렵한 기운이 있어서 편지 글씨처럼 작은 것은 동글동글하고 예쁘지만 큰 글씨를 쓰면 다소 유약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머리는 튼실하고 하체는 부실하다는 특징이 보여 이는 어떻게 보면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합니다. 전반적으로 사분사분하고 예쁜 글씨로 예를 들면 삼수변(氵) 같은 것은 처음에 힘을 주어 내려 꺾다가 마지막에 살짝 찍어 휙 돌리는데 그의 글씨의 특징 중 하나가 됩니다.
윤순 <행서 칠언절구> 비단에 먹, 124.7x54.8cm
대폭에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당당한 작품이다. 내용은 주자가 양정수라는 사람이 이소에 대해 물어와 가볍게 답했다는 시「戱答楊廷秀問訊離騷」를 행서로 썼다.
윤순 <고시서축古詩書軸> 부분, 1737년, 종이에 먹, 45.2x404.5cm, 국립중앙박물관(보물 1676호)
58세 되는 1737년(영조 13) 3월에 태화산에서 <문선(文選)>의 옛시 12수(首)를 해서, 행서, 초서체로 쓴 것이다. 소해는 왕희지풍, 중자 해서는 동기창풍, 행서와 초서는 미불 서풍을 바탕으로 동기창 서풍이 가미되어 있다고 평가된다. 축 앞뒤에 당대와 후대의 명사 네 사람(이덕수, 홍양호, 강세황, 조윤형)의 제발이 딸려 있다.
윤 백하의 글씨에 대해 추사 김정희 같은 분은 그가 양호필(羊毫筆 양털로 만든 붓)로 썼기 때문(에 유약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광사나 서무수 같은 제자들 글씨가 윤 백하보다 강한 느낌을 주는 것이, 스승이 양호필을 쓴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더 뻣뻣한 붓을 썼기 때문은 아닐까 이렇게 추측해 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중국의 서예가 스타일과 비교하자면 소론의 글씨는 중국 명대의 명필 동기창, 문징명, 축윤명 중에서 동기창을 많이 따른 것이 사실인데, 백하 윤순은 그래도 동기창보다는 문징명 쪽에 가깝습니다. 문징명은 동기창보다는 덜 부드럽고 거친 면이 있습니다. 동기창은 조형성에서 안정감이 있는 데 비해 문징명은 약간 길쭉하고 각이 있으며 강약의 차이가 더 커서 기필과 수필, 즉 처음과 끝마무리 쪽이 뾰족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날씬한 느낌을 줍니다. 가운데 획을 가늘거나 두껍게 강약을 줍니다. 똑같지는 않지만 그러한 스타일을 받아 왔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보면 송나라 미불 글씨와의 유사성도 보입니다. 다만 미불 글씨는 날렵하면서도 연약하지는 않은데 윤 백하의 글씨는 묵중한 맛은 떨어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 예쁘고 날렵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또 사분사분한 윤 백하의 글씨를 좋아합니다. 이광사의 글씨는 예쁘다고는 할 수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