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소론이 얽힌 집안들
우암 송시열을 위시한 노론의 글씨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니 이제 소론의 글씨에 대해 짚어봐야겠네요. 서예가라는 타이틀을 가질 정도, 즉 ‘누구누구체’라고 이야기할 정도가 된다면 당색이 크게 의미 없지만, 일반 학자나 선비들은 스승이나 주변 사람들의 글씨를 따르게 되어 글씨에 당색이 비쳐지게 되지요. 당색을 막론하고 글씨를 인정해 줄 정도가 되면 조선 서예의 흐름에서 중요한 인물로 꼽을 수 있게 될 겁니다.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의 경우 글씨를 잘 써서 알아주는 사람이 많았는데, 노론계의 인사 담정(藫庭) 김려(金鑢, 1766-1822)도 소론계인 자하의 글씨를 칭찬하여 ‘근자에 글씨 잘 쓰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분위기로는 노소론이 서로 상대의 장점을 인정하고 공표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소론의 글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세 인물을 뽑는다면 백하 윤순, 원교 이광사, 송하 조윤형 정도가 될 듯합니다. 주로 영조 전후 시기의 사람들로 이들이 나이가 들 무렵부터 당파의 갈등과 배척이 심해졌습니다.
이들이 젊었을 때만 해도 아버지와 선생님, 아버지와 장인의 당색이 다른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담헌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두타초(頭陀草)』문집 등에 중국 그림들의 화평과 화론, 윤두서 자화상과 정선 그림에 대한 화평을 남겼던 그는 많은 서화와 서책을 수집한 장서가로도 유명하지요. 이분의 아버지인 대제학 이인엽은 골수 소론인데, 장인인 송상기(1657-1723)와 스승인 김창협(1651-1708)은 노론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고, 이모부인가는 남인이었다고 합니다. 노론이 위세를 떨칠 때 소론 집안이었던 그는 벼슬을 포기하고 고향 진천으로 내려가 평생 시서화를 즐기며 살았습니다.
이하곤 <도원문진도> 비단에 수묵담채, 25.8x28.5cm, 간송미술관
이하곤 <해응도>와 화제 글씨
그 때 책을 싣고 내려가던 수레만 몇 십 대였다고 합니다. 돈이 모자라면 옷을 벗어주기까지 해서 모은 서적이 만 권을 넘어, 진천에 지은 서재 완위각을 만권루(萬卷樓)라 불렀습니다. 주로 중국 책과 서화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윤두서, 겸재 정선과 친하게 지냈으며 이병연, 이광사, 표암 강세황과도 어울렸습니다. 백하 윤순도 진천에 머물 때 이하곤을 자주 방문해 책을 읽고 담소를 나눴고, 당대의 명사인 김창흡(金昌翕)이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하나하나 장서인을 찍으며 모은 만 권의 책은 안타깝게도 모두 어딘가로 흩어져버렸습니다.
*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자신도 늦게서야 벼슬을 해서인지 노소론에 개의치 않고 사람을 사귀었습니다. 안산 쪽에 머물면서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년)과 교유 관계를 맺기도 했습니다.
표암 강세황 <여치와 맨드라미> 1747년(정묘) 종이에 수묵담채, 그림 32.2x21cm 제 32.2x17.5cm
백하 윤순, 원교 이광사, 송하 조윤형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1)은 해평 윤씨 집안으로 서인의 맹장인 오음 윤두수(1533-1601)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윤두수 집안과 북인의 영수인 이산해의 집안이 인척관계로 얽히면서 백하 윤순의 집안은 소론으로 자리잡습니다. 윤백하의 글씨는 제자격인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와 서무수로 이어집니다. 윤순의 집안과 이광사 집안, 달성 서 씨 서무수 집안 모두 인척 관계로 얽혀 있습니다.
윤순, 고시 행서, 1737년, 45x403cm
이광사, 오언율시 행서, 각 23.5x29.8cm 개인
조윤형, 고시 행서, 24x28.3cm 건국대박물관
이광사는 윤백하의 문하에서 배웠다기보다는 젊을 때 사숙처럼 교유하고 영향을 받아 그의 제자로 일컬어집니다. 이광사의 글씨는 조윤형(曺允亨, 1725-1799)으로 이어집니다. 이광사의 수제자 조윤형은 설정 조문수의 5대손인데, 근역서화징에는 조윤형이 윤순의 사위로 되어 있으나 오류인 것으로 보입니다.
윤순의 아들을 비롯한 윤 씨 집안도 그렇고 이광사의 아버지 이진검, 그의 형제들인 이진수, 이진망, 이진순 모두 글씨를 잘 씁니다. 이광사의 첫째 아들은 연려실기술로 유명한 이긍익이고, 둘째 아들 이영익이 글씨를 잘 씁니다. 이영익의 아들인 이면우도 글씨가 좋습니다. 이영익은 아버지의 서예이론을 받들어 “서결”이라는 서예평론집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첫권은 아버지 이광사가 직접 쓰고 후집은 아버지의 말을 받아적은 것입니다. 이광사가 유배 가 있을 때 둘째아들이 따라가 수발을 들었던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