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은 몸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던 듯 동뇨(童尿)를 먹었다고 하지요. 어린아이의 오줌, 즉 동뇨는 한의학에서 약재로 쓰는데, 몸에 좋다고 찾아 먹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로 오줌을 끓여서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하고 반짝이는 알갱이, ‘추석(秋石)’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혈관을 깨끗하게 하는 데 최고의 약이라고 합니다. 현대에 와서도 모 선생 등은 일본책을 보고 만들어 먹었다 하는데, 지금은 그것을 먹는 전통(?)은 대가 끊겼을 겁니다. 조선 후기만 해도 그것을 찾는 이들이 있어서 동뇨를 여름 가을 내내 모아서 겨울에 한꺼번에 끓이는데 냄새가 너무 심하니 산골짜기에 솥을 걸어놓고 끓여 서울로 가져오면 아주 높은 값에 팔 수 있었습니다. 동뇨를 많이 먹으면 장 안에 막이 생겨 웬만한 약을 먹어도 설사를 하고 받지 않는다고 하는데, 우암은 평소 동뇨를 먹어 두 번 사약을 받았을 때 설사를 해서 죽지 않아 자신의 뒤꿈치로 항문을 막아 흡수되게 해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우암도 여러 분야에 학식이 높았지만, 미수는 60세에 벼슬하기 전까지 내내 공부만 하면서 천문, 지리, 풍수, 음양, 사주팔자 등 다 통달했던 사람입니다. 한번은 우암이 병에 걸려 약을 지어 먹으려 하는데, 당대 최고로 한약에 밝았던 미수 허목에게 약을 지으러 사람을 보냅니다.
조선시대 웬만한 양반가에는 약장이 있어서 귀한 약 빼놓고는 약재들을 모아놓고 있다가, 가족 친지가 병이 나면 웬만한 것은 동의보감, 제중신편 같은 의서를 보고 직접 지어 먹습니다. 그러다 특별한 병에 걸리거나 하면 유명한 한의사 등을 찾아 병증이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종이에 써서 아래 사람을 보내어 화제(和劑, 약방문)를 받아옵니다. 그러면 화제대로 약재를 넣고 약을 지어 먹는 것입니다. 용한 한의사가 저 멀리 경상도에 있으면 사람을 경상도까지 보내어 받아오기도 합니다.
미수에게 약방문을 받아 보니 약재 중에 비상이 들어 있었고, 이를 본 아들과 제자들이 미수를 향해 마구 욕을 했습니다. 정적이라 우암을 죽이려고 독약인 비상(砒霜)을 넣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죠. 그런데 우암 자신은 그러지 말고 그 사람이 쓴 대로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랫사람들이 겁이나 비상의 양을 쓰인대로 다 넣지 않고 반만 넣었고 결국 병은 완전히 낫지 않았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허미수는 우암이 동뇨를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비상을 넣어 그 막을 긁어내야 약효를 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고, 그것을 알지 못한 아랫사람들 때문에 약효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는 일화입니다.
미수는 기묘한 재주를 지닌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미수가 젊었던 시절, 같은 집안 형님뻘인 허한許僩과 함께 절에 들어가 함께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절에서 매달 보름마다 중이 한 사람씩 사라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허한이 조사해보니 이무기가 중을 잡아먹는 것이기에 그 이무기를 죽였는데, 그 이무기의 나쁜 기운이 그에게 묻어 온 것을 느낀 허미수가 허한에게 나쁜 기운이 집안에 뼏었으니 아들을 낳거든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허한은 그의 충고를 따라 차례로 태어난 두 아들을 죽였고, 셋째 아이도 죽이라고 했지만 차마 죽일 수 없어 그대로 살려두었는데 이 아이가 바로 묵재 허적입니다. 허미수는 그 아이가 자신에게 화를 미칠 것이라고 생각해 허한 집안과는 의절했고, 허적은 총명하게 자라나 과거 급제하고 우의정 영의정 벼슬에 이르렀으나 결국 역적으로 몰려 사사되고 집안에 해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허목은 우암 처벌을 강력하게 논한 청남파이고 허적은 온건한 탁남파로, 허목은 허적을 아주 강경하게 공격했습니다. 나이 어린 허적은 일찍부터 벼슬을 했던 사람이어서 허목이 벼슬길에 올랐을 때는 허적이 더 높은 사람이었으니 여러 가지로 고운 심정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우암 송시열과 가장 친했던 친구를 꼽으면 명재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1610~1669)와 초려 이유태(1607~1684)가 있고, 탄옹 권시(1604~1672), 시남 유계(1607~1664) 등과도 친했는데 이중 윤선거 와는 심하게 다투고 갈라서며, 백호 윤휴(1617~1680) 또한 젊을 때 친하게 지내다가 그가 남인의 골수가 되면서 갈라지게 됩니다. 학문적 시각 차이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윤휴는 주자를 공격하는 입장이고, 송시열은 주자를 완전히 존중하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우암이 손자한테 보내는 편지 중에 윤휴를 심하게 비방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우암처럼 대단한 사람이 손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른 사람 욕을 넣다니 하고 말이죠. 원래 친하게 지냈다가 다투고 갈라지게 되는 경우 상대에 대한 비방이 더 지독한 것을 종종 보게 되곤 하는데, 옛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사실 윤휴의 글씨는 미수 허목과도 비슷합니다. 미수 허목과 백호 윤휴가 학문적으로 크게 교유한 증거는 없지만 그들 사이에 뭔가 있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 글씨 때문이기도 합니다.
백호 윤휴, 간찰, 종이에 먹, 30.5x27cm 케이옥션 2020년 07월 15일 메이저경매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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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미수 전서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사람들 중에 봉화의 안동 권 씨 가문이 있습니다. 충재 권벌의 후손들이 미수 허목의 제자들이라서 전서를 많이 썼고 특히 권규(權珪, 1648-1722)라고 하는 양반이 미수의 수제자 뻘의 전서 솜씨를 남겼습니다.
권규 <박대립(朴大立) 신도비> 비액 탁본
(*이미지 : 김윤숙 「미수 허목의 전서 연구」 원광대학교 대학원 석사 논문 2001)
허목 <유석(柳碩) 신도비> 전액 탁본
권규는 글씨도 잘 썼지만 인장도 잘 팠습니다. 미수의 경우 그림은 종종 나오기도 하는데 인장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권규와의 관계로 짐작해 볼 때는 인장도 직접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권규의 아버지인 권대운이라는 사람은 남인으로 숙종 때 영의정까지 올랐고 서인인 우암 송시열을 사사하도록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허 미수의 전서 글씨는 미술시장에서 높이 평가되기 때문에 비슷한 전서가 나오면 다 미수의 글씨라고 이름붙이기 쉽다는 맹점이 있습니다. 그를 추종하던 남인 계통의 글씨들이 비슷하기도 하고 특히 권규 글씨는 구별하기 어려워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전서는 필력이 없는 사람이 노력한다고 해서 쉽게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허 미수의 글씨는 안정감이 좀더 있고 소리없이 강하다고 해야 할까, 조용하면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는데, 제자들의 글씨는 좀더 소란스럽고 안정감이 떨어집니다.
글씨 감정을 할 때는 여러 상황을 보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추사글씨를 볼 때는 글씨의 형태 뿐만 아니라 종이와 먹 색깔 같은 것도 함께 봐야 합니다. 특히 종이 같은 경우는 대체로 매우 깨끗하고 질과 상태가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의심해봐야 합니다. 일부러 오래된 것처럼 종이가 손상되거나 때를 묻게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대부터 큰 존경을 받았던 사람의 작품을 함부로 보관할 리가 없지요. 인장이 불분명한 것도 가품일 가능성이 큽니다. 추사는 인주도 최고로 쓰고 성격도 세심하고 깔끔해서 도장을 함부로 찍을 리가 없으니, 흐릿한 인장이라면 다른 사람이 찍은 것입니다. 성격은 평생 변하지 않았으니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