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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수 허목의 글씨 2 - 전서를 닮은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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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의 해서체

미수 허목은 전서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전서 쓰는 법을 적용해서 쓰는 해서 또한 아주 좋습니다. 그의 해서체는 전서 식으로 쭉쭉 내려 힘 있게 쓰는 글씨로 이를 찾는 이들이 꽤 있어 현재도 그의 간찰들이 종종 시장에 나와 거래되곤 합니다. 미수의 해서와 행서는 전서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글씨라고 해야 할까요. 뼈대만 있는 듯한 모습인데도 그것이 아주 감칠맛 나고 예뻐서 매력적입니다. 


미수 허목의 해서체 <권태여 묘표>



미수 허목 <증행호서관찰사서贈行湖西觀察使序> 


미수의 글씨를 보면 나뭇가지 같으면서도 맑고 쨍해서 사람의 외모도 바짝 마르고 키가 클 것 같습니다. 이와 비교했을 때 우암 송시열 선생의 글씨를 통해 떠오르는 이미지는 두리두리 퉁퉁하면서도 독수리같은 날카로움이 있을 것 같은데, 신기한 것이 초상화를 보면 그런 이미지와 두 분의 겉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미수와 우암의 초상


동인/영남학파의 두 줄기인 남명파(북인)와 퇴계파(남인)에서 미수 허목은 퇴계파이지만 그의 학문은 퇴계 이황과도 다르고 남명 조식과도 조금 다르면서 두 분을 모두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허목의 스승이 퇴계파의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정구는 남명 조식의 제자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와도 친분이 있고 남명파 쪽에도 출입을 했기에 그 영향으로 허목 또한 퇴계파 중 남명의 영향을 받은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인 계통의 사람들은 전서와 해서에서 대개 미수의 글씨를 따릅니다. 행서는 퇴계의 서체를 따르면서 해서는 미수의 서체를 따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같은 사람들인데, 전서는 전부 다 미수체를 쓴다고 보면 됩니다. 이에 반해 노론 쪽에서 전서를 남긴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전에 성호 이익의 해서 글씨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익의 초서와 행서는 황기로의 분위기를 풍기는데, 해서는 미수의 영향이 드러납니다. 남인들에게 미수의 전서체 영향은 꽤 커서 조선 후기까지 내려옴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선비의 글씨에서 미수의 영향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남인 쪽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서인인 원교 이광사의 증조부로 벼슬을 하던 서곡(西谷)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라는 분이 있는데, 이 분은 직접적으로 ‘미수체를 쓰면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판서였던 그는 숙종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서 그 전서체는 문제가 있는 글씨이니 유행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할 정도로 당시 미수의 전서체가 양반들에게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조선시대에 들여온 중국 고대 탁본의 진위가 불분명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유명 서예가 K씨 등은 미수의 서체에 대해 ‘가짜 비석 가지고 배운 글씨를 대단하다 여길 수 있느냐’는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신우비 탁본이 진짜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보기에 진짜 요순시대 글씨는 아니었을지라도 그것을 모사한 북송 때의 글씨였던 것 같고, 더구나 그 글씨를 의탁한 것이든 아니든 미수의 노력으로 만들어 낸 한 시대를 풍미한 글씨에 대한 평가는 그와 무관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정통성을 찾아나가려고 했던 글씨였으나 그것이 너무 파급 효과가 컸기에 반작용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조선시대 전서를 잘 쓰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조선시대의 전서
조선시대 전서는 비문의 맨 위 제자(題字), 비액(碑額)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 부분을 전서로 쓰는 이유는 전서체가 신과 통하는 신성한 글자로 여겨졌기 때문이죠. 전서로 쓴 비액, 전액이 있었기에 우리나라에 전서가 전해질 수 있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조선시대 전서를 잘 쓰던 사람들은 매우 귀했는데 여유길, 여이징 부자 등이 포함된 여 씨 집안이 유명합니다. 치욕의 역사인 삼전도비에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을 쓴 것이 여이징(1588-1656)입니다(삼전도비 본문 글씨는 오준이 썼습니다). 굴욕적인 비이기는 하나 당대에 가장 잘 쓴다는 사람이 불려왔겠지요. 이 외에 선원 김상용(1561-1637)의 안동 김 씨 집안이 전서와 예서를 썼고, 김만중의 광산 김 씨 등 몇 집안에서만 전서를 썼습니다. 


삼전도비 탁본 '대청황제공덕비' 비액 부분


김정희의 추사체도 우리 서예를 대표하는 글씨지만 중국의 서체에서 변형된 면이 강하고, 독창적인 것으로 꼽자면 미수를 꼽을 수 있습니다. 중국의 글씨를 공부하고 받아들였지만 중국에서는 쓰지 않는 전서를 자신이 종합해서 만들어 낸 것이니까요. 자신의 창작 지분이 30~40%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러니 대단한 분이지요. 

*미수 허목은 비문을 써 달라는 부탁도 많이 받았습니다. 우암 선생이나 이분이나 비문이 많이 남아있지만 우암 선생의 비문은 매우 긴데 비해 미수의 비문은 짧고 간단명료한 편입니다. 

SmartK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0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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