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의 라이벌, 미수 허목과 묵재 허적
우암 송시열의 맞은편에 있는, 당시 밀접한 관계가 있던 인물들인 미수 허목, 묵재 허적, 백호 윤휴 등의 인물에 대해서도 함께 알아야 합니다. 먼저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 그는 정치나 역사, 유학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서예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읿니다. 전에 언급했듯 과거를 보지 않고 유일로서 이조판서, 우의정까지 올랐던 남인의 우두머리였으며 무엇보다 예학에 밝았던 사람이라 효종을 둘러싼 1, 2차 예송논쟁의 중심인물이 됩니다(예송禮訟이라는 말 자체가 예법에 관한 논쟁이라는 의미. 예전에는 효종 사후 예법가지고 벌어진 당파간의 논쟁을 ‘예송’이라고 불렀고, 요즘은 예송논쟁이라고 합니다.).
소현세자의 동생이었던 효종이 재위 10년만에 세상을 뜨면서 서인(노론)과 남인이 극도로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주되게는 상복을 어떻게 입느냐는 문제가 시발점이 되는데, 1차는 효종이 죽고 나서(1659년 기해예송), 2차는 효종의 비가 죽고 나서(1674년 갑인예송) 일어나며 효종의 아버지 인조의 계비, 즉 새로 왕이 된 현종의 할머니뻘인 조대비가 살아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효종이 죽은 다음 왕위에 오른 현종은 송준길과 송시열에게 장례 일을 맡겼습니다. 자의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에 대해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이 장자가 아닌 둘째 아들이므로 2년이 아닌) 1년으로 정했는데, 이때 남인인 허목과 윤휴 등이 반발, 효종이 왕이었으니 장자와 다름없으므로 만 2년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1차 예송논쟁에서 장자의 예로 할 수 없다고 한 결정이 받아들여져 우암 송시열이 이끄는 서인의 승리. 이때 송시열의 나이가 53세, 허목의 나이는 65세였습니다. 2차에서는 반대의 양상이 됩니다. 15년 쯤 지나 효종의 비(인선대비)가 죽자 다시 조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되는지 둘러싸고 똑같은 싸움을 벌입니다. 서인은 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은 1년을 주장했고,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집니다.
단순히 상복을 얼마나 오래 입히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사실 이것은 왕권에 대한 개념 등 정치적인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정파간 양보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효종이 둘째 아들이니 장자의 예를 따르지 못하게 하는 서인의 입장은 왕권을 사대부와 동등하게 보는 시각이고, 비록 둘째아들이라도 왕이기에 장자의 예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왕권강화를 꾀하고자 하는 남인의 견해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양반지배층의 권리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하고 어느 선까지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이런 식으로 드러났습니다.
2차 예송에서 (패배한) 우암을 벌하기에 이른 상황. 우암을 처단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펼친 이가 허목이고, 온건한 처리를 주장한 이가 묵재默齋 허적(許積 1610-1680)입니다. (송시열의 처벌문제로 남인은 청남, 탁남으로 분열됩니다. 허목은 청남, 허적은 탁남) 허적은 남인이지만 서인인 송시열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허적과 허목은 가깝지는 않아도 한 집안 사람들인데, 싸우고 반목하게 됩니다. 어쨌거나 우암은 남인의 공격으로 이곳저곳 옮겨가며 유배지 생활을 하다가 숙종 등극 6년 후 1680년 경신환국 때, 73세로 70살의 허적을 상대로 승리합니다. 이 때 허적은 서자의 역모 혐의로 사약을 받아 죽습니다. 청남파 윤휴 또한 경신환국으로 세상을 뜹니다. 남인은 이로 인해 몰락하고 나중에 희빈 장씨 소생 세자책봉 문제와 연관된 기사환국(1689년)때 잠시 등장했다가 갑술환국(1694년)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허목은 우암 처벌을 강력하게 논한 청남파, 허적은 온건파로 입장이 흐릿한 탁남파의 대표이고, 허목은 과거시험 없이 나이 들어 벼슬을 시작해 유일로 우의정까지 오른 사람이고, 허적은 정식으로 소과 대과 합격하고 우의정 거쳐 영의정을 한 사람입니다. (우암은 그나마 소과라도 본 적이 있는데 허목은 과거에 합격한 적도 없습니다.) 우암도 미수도 높은 학문으로 존경받는데, 우암은 골수 주자학자이고 미수는 약간 생각이 달라서 주자 이전에 한나라 때의 유학을 우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송 이전의 것을 따라야 한다고 해서 글 또한 간단명료합니다. 이에 반해 우암의 글은 긴 편이고 글씨는 낭창낭창한 느낌을 줍니다.
미상, <미수 허목 초상> 72.1x56.8cm(그림), 국립중앙박물관(보물 1509호)
허목은 우암 처벌을 강력하게 논한 청남파, 허적은 온건파로 입장이 흐릿한 탁남파의 대표이고, 허목은 과거시험 없이 나이 들어 벼슬을 시작해 유일로 우의정까지 오른 사람이고, 허적은 정식으로 소과 대과 합격하고 우의정 거쳐 영의정을 한 사람입니다. (우암은 그나마 소과라도 본 적이 있는데 허목은 과거에 합격한 적도 없습니다.) 우암도 미수도 높은 학문으로 존경받는데, 우암은 골수 주자학자이고 미수는 약간 생각이 달라서 주자 이전에 한나라 때의 유학을 우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송 이전의 것을 따라야 한다고 해서 글 또한 간단명료합니다. 이에 반해 우암의 글은 긴 편이고 글씨는 낭창낭창한 느낌을 줍니다.
미수 허목의 전서
허목은 선조의 손자뻘인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俣, 1637-1693)라는 왕족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이우는 선조의 서자-12번째 아들,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인흥군 이영의 장남입니다.) 이 낭선군이라는 분이 스스로 잘 쓰기도 했고 글씨를 많이 모아 편찬하는 등의 업적이 있어 주목할 만 합니다. 낭선군이 1663년 중국에 다녀오면서 중국 형산에 있는 신우비 탁본을 들여왔는데, 신우는 요순시대 우임금을 말하는 것으로 우임금의 글씨이니 매우 귀한 탁본입니다. 이를 가져다 미수 허목에게 보여주었고, 미수는 “그 글자가 용사(龍蛇) 조수(鳥獸) 초목(草木) 같이 빛나고 신괴(神怪)하여 어떻게 형용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큰 인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미수는 전서에 몰두하여 독특하고 새로운 글씨체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미수체” 또는 “미전(眉篆)”이라고 불리는 전서체입니다.
허목 <전서 시고篆書詩稿> 36.5x24cm
허목 <애민우국愛民憂國> 53x156cm
전서는 따로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어려운 분야입니다. 미수체는 중국에도 없고 우리나라에도 없는 독특한 서체로 전서 연구하는 분들도 특이하다고 평가하며, 중국과 우리나라를 통틀어 ‘동방제일의 전서’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조형적으로 뛰어나고 묘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중국의 전서들은 대개 강약이 없고 특별하게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려운데, 미수의 전서는 강약도 있고 원형과 사각형 등의 도형 감각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해서 느낌도 약간 있고, 일부러 비뚤비뚤 쓴 듯하여 오묘합니다.
허목 <증혜사운贈慧師韻> 부분, 31.9×57.9cm 경남대박물관(데라우치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