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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시열의 후예 - 노론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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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이후 남인이 몰락하고 나자, 노론이 소론과 대립하면서 정계를 이끌어나갔고 영조 즉위 이후에는 소론이 이끌었던 이인좌의 난을 누르고 노론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됩니다. 영․정조 시대 탕평책으로 그 이전과 같은 붕당의 의미는 없다고 하지만 19세기 이후에도 송시열에 의한 배타적 성리학을 밑바탕에 깔고 있었던 노론의 명분과 이론이 조선 사회를 지배합니다. 

노론 인사들의 글씨는 어떠했을까요? 재미있는 것은 특정한 흐름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제각각이라는 것입니다. 개성적이라고 해도 글씨가 훌륭해서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서를 예로써 제대로 배우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는 김창흡(1653-1722)이 안진경체로 눈에 띄는 서체를 보입니다.


김창흡 <우중유회(雨中有懷) 기사흥연안(寄士興聯案>> 30.2x61.3cm, 개인



김창흡 <태학사관기손아(太學士冠其孫兒) 희음양수(戱吟兩首)> 1718년, 《삼가첩(三加帖)》 46.5x32.8cm, 경기도박물관


조선 후기 노론의 인사들은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해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배척하는 분위기였고 글씨를 잘 쓰고자 하는 것 또한 공부하는 데 해가 된다며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노론뿐만 아니라 후기의 학자들 중에는 글씨 잘 쓰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한참 후 등장하는 추사 김정희가 명필로 이름 높은데 그는 사실 노론 계열에 속합니다. 그가 가진 천재성으로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 낸 개인적 성취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노론 글씨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이라면 우암 송시열라 할 수 있어서, 그의 글씨가 대대로 노론의 글씨를 유사하게 만든 면이 있습니다. 우암의 글씨는 누군가 작대기 글씨라고 할 정도로 찍찍 긋는 선이 많아 투박하고 자신감이 엿보이는, 나름의 개성이 있는 글씨입니다. 김창협(1651-1708) 등 노론 학자들 글씨의 뿌리를 우암으로 봅니다. 


김창협 <오언율시> 《연원첩(淵源帖)》補, 27.8x37.5cm, 개인



송시열 <답박찬지 찬(答朴贊之 籫)> 1676년, 31x38.5cm 《문정부군유필(文正府君遺筆)》 개인



상대적으로 우암에 비해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가 더 낫습니다. 노론의 제자 후손들이 학문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글씨도 훌륭한 동춘당의 글씨를 따를 만한데도 송준길보다 송시열의 글씨가 대세가 된 데에는 은연중의 가르침-아름다움 추구에 대한 반발-이 압력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동춘당同春堂’처럼 호에 “-당”을 붙이는 당호는 높으신 분이 거처하는 곳이나 그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로 관행 같은 것입니다. 당(堂)은 불교에서 스님을 높여 부르는 데에도 많이 사용됐던 것인데 어느 시기부터인지 유학자들도 당 자를 많이 붙이게 됐습니다. ‘-선생’ ‘-장’이라고 높여 부르기도 했고, 나이 든 후에는 ‘춘옹春翁’처럼 할아버지 옹翁 자를 붙여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송준길은 ‘문정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무인이 무 자 시호를 받는 것이 최고이듯, 문인에게 문 자 시호를 받는 것은 최고의 영광입니다. 퇴계는 사후 문순공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관례를 치르고 받는 이름 ‘자(字)’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은 대개 친한 친구나 윗사람인 경우입니다. 

노론 중 앞서 비석 글씨에서 등장했던 수암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글씨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 사람의 비석 글씨에 중국 사신이 절을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강직한 느낌을 주는 비석 글씨로 유명하며, 이도 ‘작대기체’라 불려지기도 합니다. 권상하는 남인의 득세로 스승 송시열이 정계에서 물러날 때 스스로 관직을 단념했고, 송시열이 제주 유배시 사약을 받을 때 임종을 지킨 제자였습니다. 치열한 당쟁 가운데서도 학문과 교육에 힘썼고 훌륭한 인품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권상하 <귀거래사> 부분, 종이에 먹, 31.5x21cm, 국립중앙박물관


권상하는 대과를 보지 않고 특채로 벼슬을 했는데, 이렇게 초야에 묻힌 재능 있는 이를 천거하여 관직에 임명하는 유일(遺逸) 천거제도가 있어서 이런 이들을 유일 또는 산림(山林)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전에 그 집안에서 벼슬을 얼마만큼 많이 했느냐로 양반가를 평가할 때 영의정 셋이 대제학 하나와 같고, 대제학 세 사람이 유일 영의정 한 사람과 같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유일로 영의정에 오르는 것이 힘들다는 이야기이겠지요. 대표적인 산림으로는 송준길, 송시열을 포함해 정인홍, 윤휴, 허목, 임헌회 등이 있습니다. 

우암 송시열은 당대의 큰 학자로 효종의 스승으로 불려갑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남긴, 그의 성격을 짐작하게 하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여관에 묵으려는데 충청도 쪽으로 내려가는 무관 진상 하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겉에서 보기에 꾀죄죄한 노인네가 들어오니 그 무관은 우암을 얕잡아 보고 함부로 말을 하다가, 누군지 물어보았을 때 송시열이라고 말하자 놀라움을 감추고 ‘어디서 사기치냐’며 더 큰소리를 치며 화를 내고 나가버렸다고 합니다. 송시열은 어이가 없었겠지만, 그의 기백과 재치를 사서 나중에 수소문해 그를 기용했다는 것입니다. 

송시열은 숙종 때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돌아오던 길에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갑술환국으로 관직이 회복되고 문정공 시호도 내려졌는데, 그를 학자로서 가장 높이 평가했던 왕은 다름 아닌 정조였습니다. 본인 스스로 주자학 이론에 밝았고 성리학 관련 책을 출판하거나 필사본을 만들곤 했던 정조는 노론들을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학자로 인정했던 것입니다. 



송준길 서, 송시열 찬, 김만기 전(篆) <돈암서원묘정비> 1669년, 종이에 탁본, 한신대학교박물관
우암이 글을 짓고(찬)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서). 돈암서원은 김장생을 모신 서원으로 충청 최고 서원이라 할 수 있다. 



SmartK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0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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