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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
  • 1549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율곡 라인에서 등장했던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서인의 중요 인물이자 성리학자로 사후에도 노론에 의해 그 지위가 확고해질 수 있었던 두 사람. 이들의 글씨에 대해 조금 더 짚어볼까 합니다. 


김창업 화畵, 김창협 권상하 찬贊, 채지홍 서書 <우암선생지칠십사세진(송시열 74세 초상화)> 비단에 채색, 91x62cm, 개인


필자미상, 정조 贊, 송시열 自贊 <우암초상> 국보 239호, 비단에 채색, 89.7x67.6cm, 국립중앙박물관


두 사람 모두 은진 송 씨이지만 혈연관계가 그리 가깝지는 않습니다. 송준길이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여덟 살의 송시열이 송준길의 아버지에게 배움을 받으러 찾아와 이때부터 함께 공부하는 사이가 됩니다. 이들이 십 대 후반일 무렵 율곡의 직속제자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에게 찾아가 배움을 청했는데, 사계의 나이가 많다보니 이후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에게 둘을 맡겨 김집의 제자로 이어집니다. 두 사람이 25, 26세일 때 사계 선생은 세상을 뜹니다. 


송준길, 「원결元結 대당중흥송大唐中興頌」, 『동춘필적II』, 종이에 먹, 44.6x31cm, 선비박물관




송준길, 「양시楊時 저궁관매기강후渚宮觀梅寄康候」, 1669년, 종이에 먹, 177.8x77.6cm, 선비박물관



송준길, 「이상사래李上舍來」, 『동춘간첩』, 종이에 먹, 29.4x37.2cm, 경남대학교박물관 데라우치문고


동춘당 송준길은 대사헌을 지내기도 했지만 수많은 벼슬 임명에도 이를 거절하고 학문에 힘쓰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조선에서 학문의 논쟁은 명분론인 예학이 기본이 되어 누가 이기고 지고 학문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느냐에 중요한 발판이 되는데, 동춘당이 성리학자로서 가장 뛰어났던 부분이 예학이었습니다. 그는 율곡의 제자이면서 최고의 예학자였던 사계 김장생의 제자이기도 했지만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의 사위이기도 해서 율곡과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복 정경세는 퇴계의 학문을 서인 쪽에 접목시킨 사람으로, 이를 동춘당이 이어받았기 때문에 예학의 대가인 동춘당 송준길에 이르러 퇴계학과 율곡학이 접목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진성 이씨(정경세 부인), 「사위 송준길에게」, 『선세언독』, 1633년, 종이에 먹, 27.5x31cm, 선비박물관


병자호란 이후 관직에서 물러날 때도 있었으나 정치적 영향력으로도 학문적으로도 송시열은 당대 최고의 학자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서인에는 특별히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평가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만 서인-노론에서 최고로 여겨지는 이들의 글씨는 당대에 물론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두 사람 중에서 글씨로만 본다면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가 힘있고 활달하고 좋아서 좀 더 잘 쓴 글씨로 인정받습니다. 

동춘당은 누구에게 글씨를 배웠는지 알 수 없고 진적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판단하기 애매합니다. 다만 동춘당의 장인어른이 퇴계 라인 유성룡의 제자 정경세라는 사실 때문인지, 상당히 퇴계의 영향이 보여서 둥글둥글한 형태가 두드러집니다. 말하자면 송설체에 퇴계 글씨를 합쳐 놓은 것 같다고 할까요. 둥글고 예쁜 데다 힘이 있어서 동춘당의 글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송시열의 글씨는 특별히 거론해야할 이유는 없지만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따져 올라간다면 율곡 이이,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의 영향이 종합되어 형성된 글씨로 볼 수 있습니다. 율곡의 글씨보다 좀 더 힘 있는 스타일입니다. 김장생의 글씨는 가분수처럼 형태가 조금 변형되어 있고, 율곡보다는 덜 부드럽습니다.


송시열, 「주희朱熹 육선생화상찬六先生畵像贊 강절선생康節先生」, 『유림첩』, 종이에 먹, 45.8,x27.7cm, 개인



송시열의 글씨는 가늘고 두꺼운 획의 차이가 많이 나는 데 비해, 송준길의 글씨는 획의 굵기가 비슷하여 밋밋합니다. 두 사람의 작은 글씨는 차이가 많이 나는데 큰 글씨는 구별이 쉽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두 사람이 함께 상의하고 결정했으나 송시열은 성정이 강하고 외골수에다 급하고 송준길은 부드럽고 신중한 성격이어서 어려움이 있었을 것도 같습니다. 두 사람의 성격이 글씨에서 드러났는지, 또 외모도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는지도 궁금하지만 송준길 초상화는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송준길과 사람들
송준길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도 스승으로 모시고 지냈는데, 청음의 형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글씨를 잘 썼습니다. 송준길의 글씨 중에는 아마도 선원의 영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 선원 김상용으로부터 이어지는 안동 김 씨 집안은 특히 예서와 전서를 잘 쓴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것이 김수증(金壽增 , 1624-1701)으로 넘어가고 현대의 일중 김충현까지 이어집니다. 일중의 예서는 집안 대대로 이어진 것입니다. 

송준길은 민유중(閔維重)을 사위로 맞으면서 여흥 민씨 집안과도 친하게 지냈습니다. 민시중, 민정중, 민유중 삼형제가 모두 잘 되었고(대사헌, 좌의정 등), 민유중의 딸이 숙종의 비 인현왕후가 되기도 합니다(명성황후도 같은 여흥 민씨 삼방파입니다). 중(重) 자 아래 진(鎭) 자 그 아래아래 백(百) 자 돌림의 사람들이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민유중과 민유중의 아들 민진원의 글씨가 좋습니다. 

송준길의 자손들로 가 보면, 현손(5대손) 송명흠과 송문흠 두 형제 때에 글씨 좋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송문흠이 전서와 예서를 잘 썼습니다. 송문흠은 이인상, 이윤영과 잘 지냈는데, 글씨와 그림이 좋아 뜻이 통했던 세 친구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SmartK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3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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