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공부를 시작할 때 천자문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고 시대의 서체 취향을 반영하게 되기도 하지요.
여러 천자문이 있지만 석봉의 천자문은 이 땅의 한자 서체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추사 글씨로 된 천자문도 꽤 있는데 대부분은 모간, 즉 베껴서 새겨 낸 것입니다. 추사의 글씨로 된 천자문도 세 가지 정도 확인됩니다.
조선시대의 천자문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 천자문 서체에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천자문의 서체 중 대표적인 것은 역시 ‘설암체’ 체본입니다. 설암은 14세기 원나라의 승려로 그의 해서체가 필획이 굵고 뚜렷해서 공민왕 이후 우리나라 편액 같은 곳에 특히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현판 하면 떠오르게 되는 우리 눈에 익숙한 큰 글씨는 아마 대부분 설암체일 것입니다.
공민왕이 썼다고 전해지는 부석사 무량수전 편액
돈의문 현판 18세기
한석봉 대자해서 천자문 1583년
이 설암체로 쓴 한석봉의 대자 천자문 체본이 오백 자 정도 남아 있어 시중에 가끔 눈에 띄는데, 아주 높은 가격으로 거래됩니다.
석봉의 대자해서 천자문을 포함하여 임진왜란 이전에 나온 천자문은 설암체의 영향이 강하고 임란 이후에 나온 것은 미묘하게 그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현대에 와서 볼 수 있는 간판형 서체 중에 “새문안교회” 로 잘 알려져 있는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 1909-2000)의 경우는 설암체에다 황정견의 서체가 섞여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식(소동파)의 문하였던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은 송나라 시인이면서 아주 유명한 서예가이지만 우리나라에 그의 글씨 영향은 크지 않은데, 김기승 글씨 중에서 중간에 가늘어지곤 하는 것은 황정견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원곡 김기승의 서체
황정견 <무창 송풍각>
대한제국기부터 일제시대에 황정견이 다소 띄워진 것은 이전 세대인 추사의 영향이 다분합니다. 거기에 일본 사람들이 황정견을 좋아했던 것도 분위기를 조성했을 것입니다. 그 시기를 대표하는 서예가 중 한 사람인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6) 또한 산곡(황정견) 서체가 떠오르는 글씨를 많이 남겼습니다.
성당 김돈희 글씨의 편액
조선시대 전체적으로 설암체의 영향이 보이지만 조선시대의 해서는 왕희지체를 기본으로 한 석봉체를 주류로 해서 조맹부의 송설체가 일부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암체는 왕지지나 조맹부라기보다는 안진경체의 느낌이 강한데, 특히 둔중한 끝마무리 같은 곳에서 그 특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노론의 취향에도 잘 맞았던 듯합니다.
(행서의 경우) 조맹부, 왕희지, 동기창의 글씨 영향이 컸는데 조선 후기는, 어찌 보면 지금까지도 서예의 전통에서 동기창 글씨의 영향이 커 보입니다. 특히 소론의 글씨는 거의 동기창체에 가깝습니다. 동기창, 문징명, 축윤명 등 명나라 때의 최고 서예가의 영향이 조선 후기에 강하게 나타났던 것이지요. 조맹부(송설체)를 보다가 동기창의 글씨를 보면 더 짜임새 있고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함을 느끼게 됩니다.
동기창 글씨를 따라 쓰다 보면 더 이상 완벽을 추구한다는 것이 의미 없는 시점이 오니, 다시 그 완벽성을 허물어뜨리면서 북송대 소동파, 황정견, 미불의 개성을 추구하게 됩니다. 원나라 조맹부의 서체가 다시 섞여 유려하면서도 힘이 있는 글씨를 추구하기도 하고, 한나라 때로 돌아가는 복고주의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느 분야나 그렇겠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글씨는 돌고 도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