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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을 대표하는 서예가 석봉 한호 2 - 한석봉 천자문
  • 2034      
한호 주변의 인물
당대에 글과 글씨 잘 쓴 사람들을 묶기 좋아했던 옛 사람이 개성 출신의 세 사람을 송도삼절 또는 개성삼절이라고 불렀는데, 한호도 여기에 들어갑니다. 송도 삼절에서 글씨는 한석봉, 문장은 간이 최립(崔岦, 1539-1612), 시는 오산 차천로(車天輅 1556-1615)가 됩니다. 
최립은 한호의 집안이 한미하여 대접받지 못하는 세태에 대해 한탄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말세(末世)의 습속을 보면, 남의 평가를 귀동냥한 것만 소중히 여기고 자신이 직접 본 것은 천시하며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조선의 풍속은 문벌만을 따져 평가하기 때문에 경홍(한호의 자)의 글씨도 그릇 비평을 받을 때가 있었다. 일찍이 나는 이런 세태를 분하게 여겨왔다. 사람들은 경홍(景洪)의 손에서 글씨가 나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멋대로 폄하했던 것인데, 만약 왕우군(왕희지)의 법첩을 임서한 경홍의 글씨를 금석(金石)에 새겨 왕우군의 작품과 뒤섞어 전하게 한다면, 과연 그것을 구별해 낼 사람이 있을까 의심스럽다" (최립-『簡易集』)

최립도 그러하지만 한석봉도 후손들이 미미합니다. 한석봉의 외아들까지는 벼슬을 했던 기록이 있지만 손자 때부터는 끊어집니다. 든든한 양반 집안이 아니었던지라 본인의 특출한 능력만으로 후손들까지 후광을 입지는 못했습니다. 

후손까지 오래오래 영광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본인의 능력이 출중한 데 더해 집안이 좋아야 했던 것 같습니다. 본인만 똑똑해서는 일찍 죽게 되거나 후손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기세 등등한 집안에서는 아주 이상한 놈이 나오지 않는 한 망하는 일이 없고 말이죠. 

난다긴다하는 그 시대의 명필 명문장가들, 고경명, 남창 김현성 같은 이들과 친하게 지냈고 글씨로 석봉의 도움을 받은 이들이 많았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어려운 문인이나 시인을 여유있는 양반들이 도와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한석봉의 묘지명을 쓴 월사 이정구(李廷龜 1564-1635)도 그를 도운 양반 중 한 사람이었고, 허봉(1551-1588), 허균(1569-1618) 형제와도 친하게 지냈습니다. 


한호 書, 허균 讚 <사명대사석장비명(四溟大師石藏碑銘)> 탁본 1612년 건립, 부분.


천자문
한석봉이 우리들에게 특별한 점은 천자문 교본을 써서 어린아이들부터 모든 글씨를 배우는 이들이 그를 통해 바르게 익히게 했고 이것이 엄청난 영향력인 것이지요. 추사는 그런 폭넓은 영향력은 없습니다. 한석봉 천자문은 여러 판본이 전해지는데 행서 대서(大書)와 소서(小書), 그리고 초서 천자문이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 귀거래사 등의 글씨를 쓴 서첩을 많이 써서 남겼기 때문에 그 영향도 오래 지속됐습니다. 서첩으로 만들어져 교과서처럼 돌려본 글씨는 중국의 송설, 왕희지등을 제하면 한석봉의 것이 절대적인 양을 차지했습니다. 1700년 이후 조선시대 내내 이 현상이 지속되어 1950년, 60년대까지도 그 효과가 남아 있었습니다. 


해서천자문 1583년 목판본 43x28.5cm (1694년 중간본)


초서천자문 1597년 목판본 25.5x18cm (1861년 중간본)


한석봉이 추사에 비해 점수를 많이 얻는 분야가 바로 이런 점이지요. 추사의 생각, 이론이 조선말기를 지배했던 것은 추사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천재로서 청나라 문인에게 인정받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는 점 때문입니다. 추사의 이론은 높은 경지를 추구한다고 해야 할까, 천재들이 이어가야 하는 생각이었고 제자들은 그 근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후의 사람들은 그를 추앙하고 넘어서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는데, 만약 좀더 실용적인 측면의 철학으로 이를 극복하고 움직였다면 조선의 마지막이 그런 모습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호는 술을 좋아하여 많이 마신 것으로 전해집니다. 집안의 한계와 다른 사람들의 시샘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술로 풀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글을 지은 것으로 고향 동네 봉우리인 ‘석봉’에 작은 초가를 짓고 그 내력을 적은 「석봉청묘초려시서(石峯淸妙草廬詩序)」라는 글은 글씨도 좋고 문장 또한 명문입니다. 


<석봉청묘초려시서> 오송정五松亭 6首, 1598년, 지본묵서, 27.5x15.2cm


한미한 집안이라는 이유로, 직업적으로 규격에 맞는 글씨를 많이 썼다는 이유로 한호에 대해 한계를 두기보다는 서예가로서의 영향력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졌으면 합니다. 

SmartK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0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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