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서예가를 딱 한 사람만 택한다면? 대부분의 국민들이 한석봉, 즉 석봉 한호(韓濩, 1543~1605)를 떠올리지 않을까요. 평가 기준에 따라 순위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가장 유명한 서예가로는 한석봉이 유력합니다. 조선 초기 안평대군의 글씨는 영향력이 큰 당대의 명필이었으나 정치적 핍박을 받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추사는 후대에 실력을 인정받고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지만 당대에 그의 글씨는 지금처럼 높은 평가를 받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정치, 역사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조선 전기가 가장 무르익으면서 세대가 마무리된 것이 선조 임금 때인데, 글씨에 대해서도 기반이 잡힌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의 인물이 석봉 한호입니다.
한호의 해서. <서경덕 신도비 명> 탁본. 박민헌 찬撰, 1585년, 28.5x16.2cm
앞서 얘기했듯이 서예가에 대한 평가는 글씨를 쓰는 실력과 더불어 그 사람의 학문과 인품, 당대와 후대에서의 영향력을 모두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본다면 석봉 한호가 조선 최고의 서예가가 맞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초반 편찬된 역대 서화가 사전 『근역서화징』에는 한호에 대한 설명이 추사 김정희에 대한 설명의 반 정도만 적혀 있습니다. 시기가 가깝고 먼 탓도 있겠지만 예술적 측면에서 석봉의 글씨는 추사 글씨와 달리 다소 평범하다고, 따라 쓰기 쉬울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한호 서, 당 유우석劉禹錫 시 <양산묘관새신陽山廟觀賽神> 지본묵서, 29.4x13cm
전설적 인물이었던 만큼 19세기 말 야담집 같은 곳에 그에 대한 일화가 꽤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어둠 속 떡 썰기-글씨쓰기 배틀이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해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일화의 근거가 될 만한 자료는 쉽게 찾아지지가 않더군요. 구전되던 이야기거나 일본에 많이 있는 일화 스타일이니 일제강점기에 창작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볼 뿐입니다. 구전되어 기록된 이야기 중에는, 높은 누각 위에 있는 기름 장수가 땅바닥에 놓인 손님의 빈 기름병에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기름을 따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한석봉이 자신의 실력에 자만하지 않고 더욱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 등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 일관(日官)이 “옥토끼가 태어났으니 동방의 종이 값이 오르겠구나.”하고 말했다. 자라는 동안, 꿈에 중국 진(晉)나라의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글씨를 주어서 받았다. 그 이후로 한석봉의 글씨는 신(神)이 돕는 것처럼 잘 썼다. 한석봉이 글씨에 자신감을 가지고, 하루는 종로를 지나가는데, 어떤 사람이 종각 밑에서, 종각 위에 있는 기름장수에게 기름을 사겠다고 하니까, 기름장수가 종각의 누각 위에서 난간 밖으로 기름통을 들고, 아래에다 기름병을 놓으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높은 누각 위에서 기름을 따르는데, 누각 아래의 작은 병에 기름이 그대로 들어가고 한 방울도 밖으로 흘리지 않았다. 이것을 본 석봉은 자신의 글씨에 아직 자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더욱 열심히 노력했다....“ -이원명, 『동야휘집東野彙輯』, 1869
사실 조선시대 글씨에 있어 기술의 연마 정도, 한치의 오차도 없게 쓰는 면 같은 부분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은 분위기가 있었던 것이 사실인데 숙련도, 완성도에 있어서는 석봉 한호를 따라갈 만한 이가 없습니다. 기름 이야기에서 그가 숙련을 중요시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지요. 조선 시대에 유행을 타던 글씨 중에는 변형이 많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개성 있게 썼더라도 똑같이 다시 쓸 수 없다면 프로라고 할 수 없겠지요. ‘잘 썼다, 명필이다’라는 말 속에는 숙련도가 기본으로 깔려 있어야 합니다. 다산도 퇴계도 이런 면에서는 석봉에게 명함을 내밀지 못합니다. 조선시대에 있어 ‘숙련도의 중요성’은 꾸준히 무시된 경향이 있습니다. 생활 속 미감이 드러나는 공예 쪽도 대충 만든 것이 많고 또 그러한 것이 쉽게 용서? 됐어요. 똑같게 만들지 않고 완전히 동그란 항아리 없고... 어떻게 보면 개성과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보면 테크닉 숙련이 덜 되어 완성도가 낮은 것이죠. 이런 것을 받아들이는 것, 괜찮다고 여기는 것에는 조선후기 표암과 추사 영향이 적지 않다고 봅니다. 예단의 큰 어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18세기의 표암 강세황(1713-1791)과 19세기의 추사 김정희(1786-1856) 정도였으니 그들의 영향력은 과도하게 컸습니다. (서울 종이값이 오를 거라는 예언 얘기는 월사 이정구가 쓴 석봉묘갈명(묘비문)에도 나옵니다.)
한호 서 <당 한유 시 劒銘, 이백 시 古風 제16수> 1604년, 묵지금니, 21.8x12.4cm
석봉 한호는 개성 출신으로 할아버지가 정5품직 정랑을 지낸 정도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가난했으니 어머니 최 씨가 떡장사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이 가난하여 종이가 없어 집을 나가서는 돌다리에 글씨를 쓰고 집에서는 질그릇이나 항아리에다 글씨연습을 했다” -김이재 편찬 『중경지(中京志)』 1824
한석봉은 24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 소속의 사자관으로 오래 일했습니다. 임진왜란 등으로 외교문서가 많이 오가던 시절 이를 도맡아 씀으로써 중국에 알려질 정도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명나라 저명한 학자였던 왕세정(王世貞)은 한석봉의 글씨에 대해 “성난 사자가 돌을 내려치는 형세이며 목마른 말이 냇가로 달려가는 것 같다”고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상당히 재치 있게 빨리 잘 썼던 것인지 왕 옆에 항상 대기했으며 중국에도 사자관으로 4-5차례 방문했습니다. 외교와 관련하여 주고받은 글씨를 보면 자로 잰 듯 똑소리가 나는데, 이것은 기행문이나 시의 글씨도 마찬가지여서 해서와 행서는 특히 정갈하고 빈틈없습니다.
다만 이런 경력 때문인지 예술적인 재질을 발휘하기보다 틀에 맞춰진 글씨를 썼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사자관의 고유한 서체는 한석봉의 글씨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니 그 부분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모든 글씨체에 숙달되기는 하였으나 속되다”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18세기 후반
한호 서, <太上老君設常淸靜經> 지본묵서, 26.1x16.5cm
선조 임금의 석봉 사랑은 그야말로 대단해서 하사품도 많이 내리고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감싸주기도 했습니다(상소와 탄핵 요구가 이어졌습니다). 가평군수 자리, 금강산을 싸고도는 흡곡현령 자리를 주는 것 등도 임금의 배려라고 할 수 있겠지요. 대마도 도주가 편액을 요청했을 때에도 신하들이 흡곡현령으로 있던 한호에게 쓰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선조에게 묻자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쓸 수 있겠는가?”라며 거절한 적도 있습니다. 또, 한호는 선조 임금보다 3년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장례조차 선조가 지휘했으며 문예군주였던 그가 한호에게 직접 ‘취리건곤 필탈조화(醉裏乾坤筆奪造化:크게 취한 가운데 우주가 내 품에 안기니 붓으로 그 조화를 담아냈구나)’라는 글귀를 써 주기도 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하고 있습니다.
"선왕께서 언젠가 그의 큰 글씨를 보고 감탄하기를, “기이하고 웅장함을 헤아릴 수 없다.” 하고는, 내관을 집에 보내어 잔치를 베풀어주고 또 한가한 고을의 수령(守令)을 제수(除授)하며 당부하기를, “기어코 그대가 요구하는 것은 필법을 후세에 전하고자 함이니, 지쳐 있을 때에 억지로 쓰지도 말고 게을리 하거나 서두르지도 말라.” 하였으며, 또 어서(御書)로 ‘취리건곤 필탈조화(醉裏乾坤筆奪造化)’ 여덟 글자를 써 주었다. 병이 들어서는 약물과 의원이 도로에 번갈아 이어졌고, 부음이 전하여지자 후한 부의를 내리고 고을 관원에게 명하여 장례를 도와주도록 하였으니, 그 은총이 이와 같았다." - 이정구가 쓴 한호의 묘갈 中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 젊은 양반들도 우습게 알고 조금 낮춰본 일이 많았는데 임금의 사랑을 받고 유명해지니 시샘하는 사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한호에 대한 평은 좋았습니다. 노비도 정승 백 믿고 행세하는 시대였다지만 선조 임금이라는 든든한 백이 있었음에도 겸손했고 글씨를 쓰는 것에 있어서도 게으르지 않고 엄청나게 쓰고 또 쓰면서 익혔던 것 같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노력 덕에 임금의 예쁨을 받으면서도 크게 어려움 없이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