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참 위로 올라가서, 그간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은 퇴계 이황의 삶과 글씨, 그리고 그의 제자들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학자 가운데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 천 원짜리 지폐를 통해 자주 보게 되는 퇴계 이황(李滉 1501-1570) 아닐까 싶습니다.
이황 <오언율시> (부분) 《퇴도선생필법退陶先生筆法》1556 각 57x34cm 보물 548호
조선 명종 11년(1556)에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 그의 제자인 송암 권호문(1532∼1587)에게 글씨체본으로 써준 것이다.
퇴계 이황은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돌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웃 노인에게서 천자문 등을 익히다가 열두 살에 작은아버지에게서 『논어』를 배웠습니다. 이후 특별한 스승 없이 독학을 했는데 건강을 해칠 정도로 주역에 빠져들기도 하다가 다소 늦은 나이인 34세에야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수찬 등으로 일하게 됩니다. 급제 후 성균관에서 친해진 하서 김인후가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였고, 자신도 이런 저런 핑계로 고향으로 되돌아가서 을사사화(1545) 이후로는 병을 구실로 하여 요청이 들어오는 관직들을 거절하고 학문에 몰두하게 됩니다. 조정에서 후원하는 사액서원의 시초인 소수서원을 만들기도 하고, 더 나이 들어서는 도산서당을 짓고 제자들을 키워내기도 합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대개 그렇듯이 고향에만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니, 1543년 이후부터 1558년까지 관직을 사퇴하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달했다고 합니다. 68세 때 갑자기 등극한 어린 임금 선조의 계속된 부탁을 물리치기 어려워 대제학을 맡고, 다음해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결국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고향으로 돌아갔고 다음 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황의 학문 세계
이황은 주자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킨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로 특별한 스승 없이 자신의 학문 체계를 세웠습니다. 물론 어릴 때는 서당에서 글을 배우지만 이러한 경우를 두고 스승이라고 하지는 않지요. 학통은 나중에 커서 제대로 깊이 있게 이론을 배우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퇴계와 율곡은 별다른 학통이 없이 깊이 있게 공부해 스스로 그만큼의 학업을 쌓았던 것입니다. 당시 이황의 학풍을 따르는 선비들은 수도 없이 많았는데, 퇴계를 한 번만 찾아갔어도 제자라고 자칭하거나 후대가 그렇게 만들어 버리기도 했습니다. 안동 언저리에서 퇴계 제자 아니면 행세를 못할 지경에 이른 정도라고 보면 될까요.
대표적인 퇴계의 제자는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과 서애 유성룡(柳成龍, 1542~1607)입니다. 이 두 사람이 학문도 쌓았고 정치도 성공적으로 해냈으니 수제자라고 할 만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대개 학문과 출세 면에서 이렇다 할 공을 세운 이(당상관 이상에 오른 이)가 없습니다. 퇴계의 제자 계파는 아직까지도 이어져서 지금도 학봉파와 서애파로 나뉩니다.
서애 유성룡은 주역도 깊이 공부했고 정치적 수완도 있었던 독특한 사람입니다. 유성룡에 비해 김성일은 이름을 널리 알리지는 못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당색의 영향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의성 김 씨 김성일의 자손은 번창한 편이어서 후손 중에는 안동 지역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사람도 있고 합니다.
율곡은 일찍 생을 마감하는 바람에 학문을 미처 성숙시키지 못했으나 퇴계는 뒤늦게 학문에 전념했지만 오래 살면서 자신의 학문을 일정 경지에 올릴 수 있었습니다. 한중일 학자들이 주자학을 이야기할 때 퇴계 이황을 높게 평가하는데, 일본에서는 특히 주사서절요 등 퇴계의 사상을 담은 책의 출판도 많이 이뤄져왔습니다.
퇴계의 저술과 사상이 일본에 전해지게 된 것은 퇴계의 제자인 강항(姜沆, 1567~1618)이 일본에 갔었던 덕도 있습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유폐되면서 그들과 학문적 교류를 했습니다. 일본의 에도 후기 주자학은 퇴계학에 가까운데, 한일 연구진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퇴계학회가 1970년대 이후부터 계속되어 학문 교류가 이어지고 한국, 일본, 대만 외에 미국이나 유럽 등 서방 국가에서도 국제학술대회 등을 통해 퇴계의 주자학에 대한 토론과 연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퇴계가 지냈던 벼슬 대제학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문화체육부장관에 서울대총장을 겸한 직함 쯤 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정2품 벼슬로 판서와 대등한데, 조선시대 때 학문하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영광스러운 자리여서,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영의정 3개가 대제학 한 개와 같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대제학은 천거로 오를 수 있는 자리여서 임금이 임명하는 다른 고위벼슬과 달리 전임자가 후임자를 천거하는 조선시대 유일의 자리입니다. 퇴계를 대제학 자리에 추천한 사람은 사암 박순(朴淳, 1523~1589)이라는 사람인데, 이황에게 배우고 이이, 성혼 등과도 친분이 깊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후임을 천거하는 자리에서 “나보다 나이도 많고 학문도 높은 이모 씨가 있는데...”라며 퇴계를 지목했다고 하지요. 퇴계가 대제학을 하고 물러나면서 다시 박순을 추천했다고 합니다.
퇴계 이황의 글씨
퇴계의 간찰 같은 것은 크고 작은 고미술 경매에 종종 등장합니다. 그는 글씨 공부를 따로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며, 학문도 그렇지만 글씨에도 스승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퇴계 이황, 간찰(제자 김언우에게). 1526년, 23x36cm. 케이옥션
<퇴우이선생진적첩> 보물 585호 중 퇴계 이황이 쓴 <회암서절요서> 케이옥션
이황 <퇴도진적>첩. 40x27cm 서첩. 케이옥션
퇴계 선생의 글씨는 동글동글합니다. 서법을 특별히 배우고 익힌 것은 아니지만 예뻐서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동글동글한 글씨치고는 힘이 있고 남성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퇴계 후손과 제자들의 글씨
제자인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 약포 정탁(藥圃 鄭琢 1526-1605), 청성 권호문(權好文) 등의 글씨는 퇴계와는 조금 다릅니다. 유성룡과 김성일의 글씨는 퍼지는 스타일입니다.
월천 조목(趙穆) 등 몇 사람과 퇴계의 아들, 손자들이 퇴계와 똑같은 글씨를 썼습니다. 퇴계와 똑같은 글씨를 쓴 사람은 우연인지 성격이 나타난 것인지 모두 벼슬을 하지 못했습니다. 퇴계의 글씨처럼 동글동글한 것은 실력이 부족하면 안으로 오그라들어 좁쌀 볶아놓은 것처럼 보기 좋지 않은 모양이 됩니다. 퇴계 글씨는 당사자가 일정하게 쓰는 건 괜찮아도 실력이 부족한 사람이 배우면 글씨가 늘지를 않고 모양이 잘 이뤄지지 않습니다. 경상도 쪽 글씨가 그런 경우가 많아서 경상도 글씨가 퇴계 글씨와 비슷하지 않으면 잘 쓴 글씨라는 말도 있습니다.
후기로 가면 자하 신위의 글씨가 예쁜데 이 분 글씨가 퇴계의 글씨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퇴계의 글씨는 송설체를 섞으면 한석봉 글씨와 비슷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한석봉 글씨도 퍼지거나 외향적인 글씨는 아닙니다. 내향적인 글씨들은 붓만 움직이고 달라붙어 알아보기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퇴계의 제자들 중에서는 선성삼필宣城三筆(선성은 예안의 지명) 또는 퇴문삼필退門三筆이라고 해서 농암 이현보의 아들인 매암 이숙량(1519-1592), 퇴계의 비문을 쓴 매헌 금보(1521-1584), 춘당 오수영(1521-1606) 세 사람의 글씨를 알아주었습니다.
퇴계이황묘전비 탁본(부분). 1577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한국문화재연구소
비문 글씨는 금보가 쓰고, 문장은 이황 자신이 지은 명(銘)과 기대승이 나중에 지은 후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숙량은 보물로 지정된 초상화로 얼굴이 잘 알려진 이현보의 아들인데, 이름만으로도 그가 세 번째 아들이 아닐까 알 수 있습니다. 백중숙계伯仲叔季라고 해서 한자 자체에 아들 순서의 의미가 담겨진 글자를 쓴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각각 맏 백(伯), 버금 중(仲), 셋째 숙(叔), 끝 계(季)인데 이런 글자들을 호나 자에 넣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자가 ‘계함’인 송강 정철은 넷째아들이었습니다. 자를 지을 때 두 글자 중 한 글자는 반드시 이름과 연결되게 짓는 등 각각의 규칙이 있어서 아무렇게나 지을 수 없었는데, 볕 경(景) 같은 것은 크고 환하고 좋은 의미를 가득 담고 있지만, 벼슬 경(卿) 같은 것은 아무런 뜻 없이 넣는 글자입니다.
퇴계의 글씨로 대표작이라 할 만한 것은 없으나, 주자서절요 등이 좋고, 글씨를 판각해서 도산서원 등에 판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매화를 무척 좋아하여 친필의 매화시가 유명한데, 제자 중에 매헌 매암 등 매화를 넣은 호가 많은 것도 스승의 기호 때문일 것입니다. 퇴계 선생의 편지도 많은데 읽을거리가 풍부하고 공부가 많이 됩니다.
퇴계의 아들은 아버지의 비문을 기대승(奇大升 1527-1572)에게 부탁하였는데, 퇴계와 기대승의 만남은 그에게 큰 의미였을 것입니다. 기대승은 퇴계보다 스물 여섯 살 어리지만 제자라기 보다는 후배에 가깝고 퇴계가 그에 자극받은 면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안동에서 광주에 있는 기대승에게 편지 왕래를 수없이 했는데, 당시 그 거리를 왕래하려면 한 달 이상이 걸렸음을 생각한다면 대단한 정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편지의 내용도 매우 독창적이고, 사단칠정론이라든가 심오한 내용을 다룬 것도 많이 있습니다. 퇴계는 기대승을 높게 평가하여 퇴계의 말에 기대승이 반박했을 때 여러 사람들 앞에서 그가 옳다고 인정한 일도 있었으며, 그를 평가할 때는 ‘벼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줏대가 있고 본질을 안다는 것입니다. 기대승의 글씨는 여성적이고 가늘고 예쁘지만 명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황과 기대승이 주고받은 편지(오른쪽이 이황, 왼쪽이 기대승). 1563년, 40.5x61.0cm, 전남대학교박물관
남명 조식을 퇴계의 라이벌이라고들 많이 이야기합니다. 남명의 제자 중에는 퇴계 제자와 겹치는 경우가 많은데, 낙동강을 중심으로 좌(경상좌도)는 퇴계 제자, 우(경상우도)는 남명 제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영남학파를 바탕으로 한 이들은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의 북인으로 나눠졌습니다. 북인은 광해군 때 집권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정치적으로 패배하여 남명의 제자들은 벼슬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도 퇴계의 제자들은 반 이상 살아남았다고 하니, 퇴계의 모나지 않은 행보가 제자들에게도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남명 조식, 간찰, 24x20cm, 남명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