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순거의 초서
앞서 말했던 우계 성혼은 자신의 딸을 윤황(尹煌)이라는 사람에게 시집보냈고 그녀는 윤 씨 집안에 가서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즉 성혼이 윤순거(尹舜擧, 1596-1668)와 문거(尹文擧, 1606∼1672), 선거(尹宣擧, 1610-1669) 형제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윤선거는 후에 소론의 영수가 되는 유명한 학자, 명재 윤증(尹拯, 1629-1714)의 아버지입니다.
이 윤 씨들 중에서 글씨로는 동토 윤순거가 가장 유명합니다. 그의 다른 글씨체들은 외가인 성씨 집안 글씨체와 비슷한데 초서는 매우 독특한 모습을 보입니다. 윤순거는 외할아버지인 성혼과 외삼촌 성문준에게서 공부했으니 이들의 영향을 받았을 텐데, 그의 초서는 양봉래의 것에 가까워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의 글씨체 중에는 초서가 가장 좋습니다. 동토 윤순거가 초서로 쓴 <무이구곡가>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윤순거 <무이구곡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1671호
무이산 아홉 구비의 뛰어난 절경을 노래한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는 중국 남송대 성리학자 주자(朱子, 1130~1200)가 무릉도원으로 극찬한 것이라는 것 때문에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무이구곡가 초서는 윤순거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활달하고 빠르면서도 여유 있는 형태를 보입니다. 17세기의 큰 글씨 초서를 대표하기도 하며 이어지는 글씨의 유행도 엿볼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윤순거 <권학문> (서울옥션)
勿謂今日不讀 而有來日 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이 있다 하지 말며
勿謂今年不學 而有來年 올해 배우지 않고, 내년이 있다 하지 말아라
日月逝矣 歲不我延 날과 달은 가고, 나 역시 그러하니
嗚呼老矣 是誰之愆 아아! 늙었구나. 이 누구의 허물인고
晦庵 右朱文公勸學文 회암(주희). 주문공의 권학문
윤순거, 칠언절구,105.5x49.5cm 개인
윤순거 <풍화설월>첩 국립중앙박물관
윤순거의 필적이 남아 있는 연천군 심원사지 취운당대사비.
소론의 영수, 명재 윤증
윤순거의 조카이자 윤선거의 아들인 명재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에서 비롯된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의 이런저런 갈등으로 서인을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서게 만든 장본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명재라는 호는 큰아버지 윤순거가 지어준 것입니다.
이명기가 변량 작(1711)의 초상화를 본으로 하여 1788년에 그린 윤증 초상.
장경주 본(1744)도 남아 있으며 이한철 또한 그렸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똑똑했던 윤증은 우암 송시열과 돈독한 관계를 맺습니다. 28세 때 김집의 소개로 22살 연상의 송시열을 만나 그를 스승으로 섬기게 됩니다. 윤증은 비록 과거시험을 포기한 상태였으나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학문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이조판서, 우의정 등 수많은 관직으로 나라의 부름을 받았지만 한번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송시열 외에도 윤증의 장인인 권시(1604∼1672), 김집(1574∼1656), 송준길(1606∼1672), 유계(1606∼1664), 윤휴(1617∼1680) 등 당대의 명사들과 사제지간과도 비슷한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중 윤휴와는 남인으로 점차 사이가 벌어졌고 송준길과는 윤선거가 세상을 뜨면서 그의 비문을 부탁하는 과정에서 다투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갈라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는 윤순거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윤순거는 초서를 쓸 때 강약을 주지 않고 획을 돌리는데 동춘당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다만 윤순거에 비해 송준길은 글씨에 짜임새가 있습니다. 윤순거 글씨는 다소 벙벙한 편으로 짜임새가 없어 보입니다.
윤순거의 동생,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의 글씨는 다소 살이 쪄 있고 아주 잘 쓰는 글씨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윤증도 그다지 훌륭한 글씨는 아닙니다. 노론 계열은 글씨 잘 쓰는 것을 그다지 좋게 여기지는 않아서 굳이 잘 쓰고자 노력하지는 않은 듯한데, 송준길이나 민정중은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윤선거 간찰. 오세창 구장품.
윤선거 간찰 23x31cm
윤증 간찰. (마이아트 옥션)
후기로 가면 서예에 대한 이러한 경향이 더 심해져서, 서예에 천착하는 것이 공부에 방해된다고까지 여겼습니다. 전반적으로 소론 계열에서 서예의 재주가 많은 편이고, 노론은 개성이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청송이나 퇴계 등의 경우, 글씨만 평가하게 된다기보다는 그들의 학문과 인품 덕에 글씨가 추앙을 받는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글씨가 좋을 때 그의 인품과 학문이 높으면 더 높게 평가된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글씨를 아무리 잘 쓴다고 해도 인품과 학문이 떨어진다고 생각되거나 집안이 약하면 그의 평가에 한계를 두었습니다. 한석봉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필요에 의해 글씨를 쓰는, 직업적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꽃집에도 글씨 쓰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이니 글씨만 보기좋게 잘 쓰는 테크니컬한 부분은 서예가로서 충분 조건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국가적 업무에서 전문적으로 글씨를 쓰는 사람이라면 학식에 있어서 알아줄 만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윤 씨 집안 후손들
이들 윤 씨 집안의 후손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된 경우가 꽤 있습니다.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의 부친, 이승만의 비서로 일했던 한학자 윤석오(1912~1980) 선생이 글씨를 잘 썼는데 이분은 일생동안 자하 신위의 글씨체인 자하체를 쓴 것으로 유명합니다. 정인보 선생이 자신의 제자였던 윤석오를 이승만 박사에게 추천했고, 중국, 당시 장개석 총통에 보내는 모든 서류를 쓰게 되며 주목받았습니다. 장개석은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해서가 특기였습니다. 윤석오 선생의 글씨는 활달한데, 본체의 성격을 따라간 것입니다. 정인보 선생의 한문 제자는 많지 않은데 윤석오는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순거, 선거 등 ‘들 거’(擧)자 항렬 밑에 손 수변(扌) 돌림자와, 동녘 동(東) 돌림자 항렬('윤동○')이 성공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파평 윤 씨지만 서울에서는 따로 '노성 윤 씨'라고 부르는 유명한 집안이었습니다. 서울 장동에 거하던 안동 김 씨들이 유명하여 '장동 김 씨'라고 따로 부르듯이 잘 나가던 집안들은 이런 식으로 달리 불렸습니다. 명재 윤증의 후손인 노성 윤씨와 더불어 연산 김 씨(광산 김씨), 우암의 후손 은진 송 씨 등이 조선 후기를 들었다 놨다 하던 집안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