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대를 이어 글씨를 잘 썼던 집안들이 많이 있는데,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의 아들과 손자, 성 씨 삼대의 글씨를 살펴볼까 합니다.
성수침은 중종 때의 사상가 조광조의 제자로,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추종자들이 제거되자 자신도 벼슬을 단념하고 은거하여 공부에 전념한 학자입니다. 높은 학문으로 이름나게 되자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도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거절하고 가난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성수침의 아들이자 제자이기도 한 우계 성혼, 그리고 손자인 성문준까지 삼대가 학문과 글씨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숙청된 조광조의 제자들은 한양을 떠나 산림에 은거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조광조의 수제자 조욱(1498-1557)은 용문산에 숨어들어갔어도 학문이 높은 것을 숨기지 못해 용문선생이라 불렸고, 성수침은 처가가 있는 파주 지역의 ‘우계’ 라는 곳에 은거하며 살았는데 이로 인해 아들 성혼의 호는 우계가 되었습니다.
성수침의 글씨는 당대에 상당히 유명했으며 크게 왕희지 계통이면서 송설체도 조금 섞여 있는데, 조선 전기에 유행하던 송설체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글자의 모양보다는 골기, 즉 힘에 주안점을 둔 글씨로 다소 짜리몽땅하다고 할까 그만의 독특한 개성을 보이며 특히 행서와 초서가 활달하고 좋습니다. 성수침의 서체를 일컬어 ‘부드러움 속에 쇠밧줄이 들어있는 듯하다’하다는 평을 들었고, 후대의 글씨에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성수침 시고, 27x14.5cm
성수침 서간 29x31cm
성수침 『청송진묵』중 일부. (K옥션 2015 겨울 경매 Lot.227)
청송진묵 서첩은 당시 3수를 비교적 대자(大字)의 흘림체로 써낸 청송 글씨의 일면을 볼 수 있다.
"홀로 산 집을 찾아 쉬엄쉬엄 가다보니, 띠 집이 비스듬히 솔숲과 마주하고 있네. 주인은 말소리 듣고도 문은 열지 않고, 울타리 감싼 들풀엔 나비만 날아드네"
남의 자식은 키워도 자기 아들은 못 가르친다고들 하는데 성수침은 아들을 제자로 삼아 훌륭하게 키워냈습니다.
성수침의 글씨가 당차다고 한다면 이에 비해 아들 우계 성혼의 글씨는 조금 여유가 있다 해야 할까요, 다소 퍼지고 크고 더 획이 많아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딴딴’하고 아들은 ‘무르다’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성혼 서간 글씨
성혼 서간 28.2x32.4cm
성혼 서간 34.3x33.5cm 1597년
우계는 선조 초기에 능력을 인정받아 누차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나가지 않았고, 임진왜란 때 우참찬, 좌참찬을 지내다 고향 파주로 돌아가 후진 양성에 힘썼습니다. 율곡 이이와 친했지만 학문적으로 설전과 논쟁이 오고가는 관계였습니다.
우계 성혼의 아들 성문준의 글씨는 아버지보다 낫다는 평가를 듣기도 할 정도로 훌륭합니다. 할아버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재야의 삶을 살았습니다.
성문준 서간 25x34cm, 159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