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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석 글씨의 조건
  • 1692      

글씨라는 것이 대체로 그러하지만 특히 비석의 글씨는 쓴 사람의 인품을 드러낸다고들 말합니다. 송준길, 송시열에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자로 수암 권상하(權尙夏, 1641~1721)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사람의 비석 글씨에 중국 사신이 절을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강직한 느낌을 주는 비석 글씨로 유명합니다. 작대기로 내려그은 것 같다고 해서 ‘작대기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권상하 초상(이명기)


  권상하는 남인의 득세로 인해 스승 송시열이 정계에서 물러날 때 그도 관직을 단념했고, 송시열이 유배지 제주에서 사약을 받을 때 달려가 임종을 지킨 제자였습니다. 치열한 당쟁 가운데서도 학문과 교육에 힘썼고 훌륭한 인품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권상하 <귀거래사> 부분, 종이에 먹, 31.5x21cm, 국립중앙박물관


권상하 필 간찰 국립중앙박물관(구 7220)


권상하 시문


권상하, 근독


다음 세대의 사람으로 비석 글씨와 해서를 잘 썼던 사람으로는 배와 김상숙(金相肅, 1717~1792)이 있습니다. 명문가 집안으로 김상숙의 아버지는 한성 판윤을 지냈고, 영의정까지 오른 형 김상복은 서화 수장가로도 유명합니다. 김상숙은 그만큼 높은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글씨를 잘 써서 영조와 정조의 사랑을 받기도 했는데, 배와의 글씨 중 작은 해서체 글씨가 인기가 있었습니다.


...해서와 반행을 잘 썼으며, 세해(細楷)에 특히 장기가 있었다. 작은 글자는 전적으로 종요법을 본받았다. 해서가 나온 이래로 종요와 왕희지가 가장 뛰어났는데, 그동안 왕희지체를 본받는 이는 많았으나 종요체는 배와가 처음이었다....배와가 일찍이 말하기를 “큰 글자는 비록 뛰어난 솜씨를 지녔더라도 종요체를 본받기 어렵고, 작은 글씨만은 본받을 수 있다.”라 했다고 한다. 이광사도 “김배와의 세해는 나도 미칠 수 없다”라고 했다. 배와의 세해는 완전히 법도와 자태가 뛰어나며, 또 그의 반행은 어슥비슥 기고 울뚝불뚝하다고 할 수 있는데, 해서의 획으로 초체를 쓴 것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격이 한 단계 높아졌다. 성대중은 “글씨도 유식과 무식으로써 높고 낮음이 나뉘어지는데, 김상숙의 글씨는 유식으로 뛰어난 것이다”라고 하였다....(이규상, 『18세기 조선인물지-병세재언록』)


당시 조선에서는 옥동 이서와 원교 이광사에 의한 동국진체(東國眞體)가 크게 유행했지만 위의 글에서 보듯 김상숙은 종요체(種繇體)를 기반으로 한 글씨를 평생 썼습니다. 종요체란 조조의 참모였던 종요(151-230)의 서체로, 종요는 왕희지(王羲之) 이전의 해서를 상징하는 명가입니다. 배와는 해서를 그 근원에서부터 접근하여 탐구하기 위해 종요까지 거슬러 올라갔던 것 같습니다. 당시 옛 글씨를 좇는 ‘위진고법魏晉古法 지향’이 있긴 했으나 그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金相肅, <菊衣頌>(1757), 종이에 먹, 24.5×46.0㎝, 국립중앙박물관
종요체 해서를 가장 잘 재현한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공의 글씨에서 아름다운 점은 실제로 자획의 바깥에 있으며 글씨의 안 깊숙이 감추어져 있고 그것의 反觀에서 담담하고 청정하다. 다가오되 매임이 없고 멀어가되 미련을 두지 않아 넉넉하고 시원하며 가까운 듯 멀리 있다. 참으로 공의 사람됨이 높으니 글씨도 이와 같다. 그래서 공의 글씨를 구경하면 그 인품과 문장도 이와 비견됨을 알 만하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공을 말하며 인품이 가장 높고 문장이 다음이며 그 다음이 글씨라고 했다. 공을 아는 이 가운데 내 말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글씨는 사실 공의 餘技다. 그러나 그것도 道氣를 드러내는 것이다... (성대중, 『靑城集』 권6, 「題坯窩書軸後」)

종요의 소해小楷를 기반으로 하는 배와의 글씨를 직하체稷下體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그가 사직동에 살았었기 때문입니다. 배와는 서예이론서인 『필결(筆訣)』을 쓰기도 했습니다.



김상숙 필 <수타사서곡당선사탑비>(1769년) 강원도 홍천

(비석 글씨) 강원도 양양의 신흥사사적비, 경기도 파주의 영상 황인보표, 경기도 이천의 이정보 묘갈


배와의 글씨는 살집있게 둥글둥글 모나지 않고 부드러우며, 모든 글씨 획이 일정한 짜임새가 있어 글씨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는 글씨뿐만 아니라 글과 그림에도 능했으며, 특히 주역, 논어, 노자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정치를 멀리하고 평생 학문을 닦는 면모를 보이다보니 그는 ‘덕이 높고 도를 갖춘 선비’로 인식되었습니다.


...사람됨이 굳고 곧으며, 검약하고 부드러웠다. 세상 일에는 소탈하고 대의에는 정밀하였다. 경학과 글짓는 솜씨는 타고난 소질이 있었고, 시문이 모두 자기의 중심에서 나와, 옛사람의 어떠한 법문도 도습하지 않아서 읽으면 맛이 있었다...”(이규상, 『18세기 조선인물지-병세재언록』)

글씨가 아무리 좋아도 비석 글씨는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습니다. 인품도 훌륭하고 해서로도 유명한 배와에게 비석 글씨 주문이 많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가 폐백을 받게 되는 경우에는 포목 등을 사양하고 문방사우 같은 것만 받았다고 합니다.


...비를 쓸 때는 여러 체로 쓰곤 했는데, 어떤 때는 종요와 왕희지체로, 어떤 때는 안진경과 유공권체로 썼으며, 더러는 김생체나 한석봉체로 쓰기도 하였다... “비록 부귀한 집의 비석이라도 좋은 비단이나 포목으로 글씨의 폐백을 받지 아니하고 다만 문방에 소요되는 것만 받으셨습니다. 일찍이 어느 절의 비문을 쓰게 되었는데, 두세 명의 사미승이 나무 찬합 몇 개를 가지고 왔습니다....아버지께서 평소의 식성이 과채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당신도 모르게 웃으면서 그것을 받으신 적이 있습니다.... (이규상, 『18세기 조선인물지-병세재언록』)

늘그막에 배와는 선산이 있는 충남 결성의 이호(梨湖)라는 곳에 가서 바다도 보고 산도 보면서 글과 글씨로 신선같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집 마당에 있던 대나무를 가지고 지팡이 두 개를 만들고, 열두 가지 각체로 시와 글을 짓고, 그 시와 글을 직접 만든 지팡이에 깨알 같은 글씨로 직접 쓰고 새겨서 두 사람의 친한 친구에게 선물하였다고 합니다. 『죽장첩』은 이 지팡이를 만들게 된 동기 등을 특유의 글씨로 비단에 써서 첩으로 만든 것입니다. 지팡이를 소재로 한 글만으로 첩 하나가 된 사례가 또 있을까요. 혹 이 지팡이의 실물이 남아 있어 이 필첩과 해후를 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상상해 보게 됩니다.


배와 김상숙 『죽장첩』 부분


배와의 글씨


김상숙 『배와필첩』 부분, 36.5x22.5cm 경기도박물관


우리나라 옛 비석에 사용된 좋은 돌은 주로 남포에서 가져온 경우가 많았습니다. 충남 보령 인근에 있는 지역으로, 그 지역에서 나는 돌을 남포석이라고 부릅니다. 관찰사로 가서 고을 사람들을 동원에 아버지의 비석에 사용할 돌을 싣고 올라오는 효심(?)을 보여준 이도 있었습니다. 비석의 돌은 남포의 오석과 함께 충주석도 유명합니다. 조선 중기에 사대부들이 충주석을 가져다가 공적이 별로 없는데도 마구 신도비를 만드는 세태를 풍자한 시가 존재할 정도로 비석을 세우는 데 열을 올렸던 시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석주 권필이 세태를 풍자한 「충주석」은 백거이(白居易)의 「청석(靑石)」을 본떠서 쓴 시입니다.

 ...
 이 말을 믿든 안 믿든 남들이 알든 모르든
 충주 산 바위를 날로 달로 깎아내어 남은 게 없네
 이 무딘 것 생겨날 때 입 없는 게 다행
 돌이 입 있다면 응당 할 말 있으리
 此語信不信 他人知不知
 遂令忠州山上石 日銷月鑠今無遺
 天生頑物幸無口
 使石有口應有辭

SmartK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3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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