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가 또는 외교가로 이름을 떨쳤고 우리에게 어우야담으로 잘 알려진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 1559~1623)*. 고흥 유씨로, 그 후손들이 전라도에 살고 있습니다. 그도 이산해 만큼은 아니더라도 글씨를 잘 쓴 것으로 전해지는데 전서·예서·해서·초서에 모두 뛰어났지만 초서가 특히 좋습니다. 속체를 배격하고 고고(高古)한 서법을 추구하였다고 평가되며, 초서가 가장 좋다는 것은 당시의 논평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근역서화징』에서 유몽인 편을 보면, 그가 남근南瑾이라는 사람에게 답장으로 쓴 편지 구절이 인용되어 있는데, 여기에 그의 서예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최치원의 해서를 배우고 또 널리 장필, 최흥효, 김구, 황기로의 초서를 취했으며, 자앙 조맹부와 안평대군의 글씨는 피하기를 마치 자기를 더럽힐 것같이 하였다. 그리하여 그 글씨의 구부렸다 폈다 서렸다 줄였다 하는 것이 모두 옛 글씨 획을 본받아서 멋대로 미친 척하는 기운이 늙어도 쇠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그의 초서가 가장 낫다고 잘못 인정하였으니, 어째서인가? 재주의 뛰어난 것은 성품에 가까운데서 나오므로 옛사람을 배워서 성공하기가 어렵고 우리나라 사람은 배워서 성공하기가 쉬운 때문이다.”
정모라는 이가 동지서장관으로 명에 갈 때 쓴 전별시. 유몽인이 환갑을 맞은 1619년 가을의 글씨이다.
유몽인이 전서, 예서, 해서, 초서를 모두 아울러 옛사람들의 서예를 임모하여 엮은 『필원법첩』이 있었다고 하는데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유몽인이나 김인후 정도로 초서를 쓸 수 있는 이들은 당시에 꽤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관리나 학자이면 모두들 글씨를 열심히 썼으나, 그래도 서예가라고 일컬으려면 항상 똑같은 수준의 글씨를 쓸 수 있고 자신이 원할 때 다르게 쓸 수 있는 테크닉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이 필수 조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석봉 한호, 남창 김현성 같은 사람들의 비석 글씨를 보면 자로 잰 듯이 정확하게 쓴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 일가를 이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꿔 말하면 비석 글씨를 써 달라고 요청이 들어올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비석에 글씨가 필요한 경우 정식 커미션을 통해 일이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방 부자가 알음알음으로 중개하는 사람을 통해 예의를 갖춰 부탁하는 식으로 조심스레 요청이 들어갑니다. 물론 사례를 하긴 하겠지만 글씨에 값을 매겨 판매하는 형식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조선 중기만 해도 중국과는 달리 감상용으로 글씨를 써서 매매를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인맥을 통해 간접적으로 거래하는 정도이지 본격적 시장이 형성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돈으로 글씨의 가치를 매긴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으므로 원하는 글씨를 얻기 위해서는 폐백이라고 해서 철되면 굴비 같은 선물을 해 드리는 등의 정성을 들여 글씨를 얻고는 했습니다. 지금은 폐백이라는 말을 혼례 후 신부가 신랑 쪽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것을 말하지만 예전에는 점잖은 예물이나 선물도 폐백이라고 불렀습니다.
미수 허목의 장인은 글씨 잘 쓰기로 유명한 사람의 글씨를 가지고 싶으면 편지를 써 보내어 답장을 받고, 이를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 편지에 답장을 하지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 시대 쯤이나 되어서야 서예 시장이 형성이 됩니다. 서울에서 추사 글씨를 가지고 시골 부호에게 가져다 팔거나 하는 경우가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시장 형성에 있어서 그림보다 글씨는 한참 늦게 만들어진 것이지요. 중국과 교역이 어느 정도 이뤄지면서 탁본첩 등을 많이 들여오게 되고 이들이 거래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전국의 비석을 탁본하여 싣고 서예가들의 글씨를 평가하여 몇 글자로 그 평가를 요약해 놓은 『동국금석평』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소장의 이 서적에는 「동국금석평」과 함께 밀랍 매화를 소개한 이덕무의 「윤회매십전(輪回梅十箋)」, 기이한 나무의 이름과 특징을 서술한 「남방이목부(南方異木簿)」, 관상용 비둘기를 상세하게 다룬 유득공의 「발합경」의 네 저술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작자 미상의 이 저술은 7세기 무렵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총 150여 명이 쓴 금석문의 글씨에 대해 ‘속되다(俗)’, ‘판에 박히다(板)’, ‘신채가 없다(無神采)’, ‘평범하다(凡)’ 혹은 ‘아이들 글씨 같다(如童筆)’ 등등의 표현으로 날카롭게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산해가 쓴 비석에 대해(조광조) “해서가 아취雅趣가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산해 정도라면 서예가 기준에 부합하지만 유몽인 등의 인물은 글씨를 잘 썼다고는 하나 위의 기준으로 본다면 본격적인 서예가로 대접받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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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몽인 : 조선 중기의 문신·외교가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간재艮齋·묵호자默好子이며,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조부는 사간, 부친은 진사를 지냈고, 성혼成渾과 신호申濩에게서 수학하였으나 경박하다는 책망을 받고 쫓겨났기에 성혼과는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고 한다.
1582년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1592년 명나라에 질정관으로 다녀오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하고 임진왜란 중 대명외교를 맡아 활약하였다. 병조참의·황해감사·도승지 등을 지내고 1609년 성절사겸 사은사로 세 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고향에 은거하다 남원부사를 맡았다. 한성부좌윤·대사간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은거했다. 덕분에 인조반정 때 화를 면했으나 벼슬에서 물러나 방랑하게 되었고 곧 유응형이 “유몽인이 광해군의 복위음모를 꾸민다.”라고 무고하여 국문을 받고 아들 유약과 함께 사형되었다. 정조 때 신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야담을 집대성한 『어우야담於于野談』과 시문집 『어우집於于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