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침착했다고 하며, 어린 나이에도 문학에 통달해 양사언(楊士彦)과도 막역한 사이로 지냈다고 합니다. 스무살이던 1580년에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해 관원이 되었고 이항복과 마찬가지로 두각을 드러낸 인재로 빠른 진급을 하게 됩니다. 소문이 명나라에까지 났는지 1582년 명나라에서 온 사신 왕경민(王敬民)이 만나보고 싶어했으나 사적으로 뵙는 것이 도리에 어긋나다며 사양하자, 왕경민이 아쉬워하면서도 이덕형의 인격을 칭찬하는 글을 보내왔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사신을 접대했고, 동부승지·우부승지·부제학·대사간·대사성 등을 차례로 지내다 만으로 서른 살인 1591년에는 예조참판, 대제학을 겸하는 높은 자리에 올랐습니다. 임진왜란 때도 왜군과 회담하거나 명에 파견되어 파병을 이끄는 등 활약을 하기도 했습니다. 1603년 영의정에 오릅니다.
이덕형 초상 초본. 동아대학교석당박물관,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8호.
이덕형의 집안은 당색이 없는 편이었으나(서인에 가까움) 이덕형이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되면서 남인과 북인의 중립적 위치에 서 있다가 이후 남인에 가담하여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남인이 됩니다. 이덕형은 남인, 오성 이항복은 서인 집안이니 어릴 때의 친한 친구도 정파에 의해 갈라지게 된 것이지요.
이덕형의 글씨
그가 남긴 간찰들을 보면 송설체의 특징이 묻어 있는 다소 거친 조선 중기의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덕형의 장인 이산해는 송설체를 바탕으로 한 초서 등으로 당대에 이름난 서예가였고 이덕형 또한 호방한 필치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전하고 있는 이덕형의 글씨는 거의 다 간찰이어서 장인어른에게 받은 영향을 뚜렷하게 알기는 어렵습니다.
이덕형 간찰. 28.5x33.5cm(묵적)
이덕형 간찰. 1593년, 33x49.5cm,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이덕형 간찰
이덕형이 직접 쓴 이산해의 묘지명에는 “붓을 대면 억센 기운이 날아 움직이는 듯하여 자득한 취미가 많았다. 수묵 그림을 잘 그렸으나 사람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았고 가끔 옛 그림을 보면 정신으로 통하여 재미있게 보곤 하였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그가 이산해의 서화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