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와 정철의 애증으로 얽힌 인연은 한 세대 더 아래로 이어집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친구 사이인 이항복(1556-1618)과 이덕형(1561-1613) 또한 각각 정철, 이산해와 관계가 있습니다.
오성과 한음 중 ‘오성’ 이항복이 정철과 관계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9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지도로 학업에 열중해 만 24세 때 문과에 급제해 벼슬에 나가게 됩니다. 권율 장군의 사위가 되었고, 율곡 이이의 문하로 서인에 속했습니다. 이이는 이항복과 이덕형이 과거에 급제하여 관청에 들어왔을 때 둘을 함께 왕에게 천거하여 무난히 고위 관직 코스에 진입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항복은 후에 스승인 이이의 신도비 글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항복은 영의정에 오를 때까지 많은 업적을 쌓았고 오성부원군이라는 작위를 받았습니다(부원군은 왕의 장인이나 공신, 정1품 이상 관료에게 내리는 작위로 그 앞에 대개 본관을 붙이는데, 이항복이 경주 이 씨라서 경주의 옛 지명인 오성(鰲城)을 붙인 것입니다). 이항복은 송강 정철의 종사관을 지낸 적이 있다고 하며, 정철이 관여한 정여립 사건을 수습하는 데 일정 역할을 했습니다. (기축옥사 이후에는 정철이 비난을 받으면서 서인을 견제할 목적으로 임명된 우의정 서애 유성룡이 그 대신 많은 일들을 무마하게 됩니다.) 이항복이 정철에 대해 결국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모르나 정철이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어보았을 때 그는 “송강이 반쯤 취해 즐겁게 손뼉을 마주치며 이야기 나눌 때 바라보면 마치 하늘나라 사람인 듯하다”고 말했다고 하니, 정치적으로는 공포의 인물이었지만 이런 부드러운 송강의 이면을 좋아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재기가 넘쳤던 이항복은 여러 재미있는 일화들을 남겼습니다. 어느 날 그가 송강 정철, 서애 유성룡(1542~1607), 월사 이정구(1564~1635), 일송 심희송(1548∼1622)과 함께 서울 교외로 나가 술자리를 하다가 누군가 "세상의 소리 중 무엇을 최고로 여기냐"고 물었을 때의 대답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정철은 대답으로 "밝은 달 아래 누각 꼭대기를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했고, 이정구는 "산속 초가에서 선비의 시 읊는 소리"라고 했으며, 심희송은 "붉은 단풍에 스치는 원숭이 울음"이라고 답했는데 마지막에 나선 이항복이 "첫날밤 미인의 치마끈 푸는 소리"라 해서 모두 웃으며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정도로 선조의 신임을 얻고 나라가 어려울 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문제를 해결한 인재였으나 조정에서 반대파의 공격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를 가서 낯선 곳에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 해에 바로 관직은 회복됩니다.
이정구는 “그가 관작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이항복, 제례에 대한 글 『백사선생수서제병진적첩白沙先生手書祭屛眞蹟帖』82면 첩 중, 각 면 36.0✕20.7cm
국립중앙박물관 이항복 종가 기증전(2020)
이항복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도 잘 그려서 당시 유명한 문인화가인 김시에게 보여 칭찬받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데『어우야담』과 『청죽화사』에는 이항복이 그림에 대해 도움을 받고자 소개편지를 들고 김시의 집을 찾아갔으나 그림부탁을 하러 온 것으로 생각한 김시의 거만한 모습에 돌아와버렸다고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그림은 재주가 있었으나 그리지 않게 되었고 임진왜란 등의 난리와 당쟁 와중에 관에 있었으니 예술을 즐길 여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항복은 글씨를 잘 써서 장유는 “필법이 호탕하면서 법도가 있다筆跡豪宕有法”고 기록했으며 이정구는 말년에 이항복이 써준 시를 받은 후에 “이항복의 풍취는 내가 사랑하던 이백과 비슷하며, 글씨도 초성草聖과 같아 세상에 짝이 없다” “이항복의 글씨는 용과 뱀이 놀라게 하듯 했다”며 자신에게 글씨를 써준 일에 대한 감사의 시를 남겼습니다(伏蒙弼雲相公寫惠靑蓮詩抄一卷).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항복의 글씨는 많이 남겨져 있지 않습니다.
이항복 자작 시고 25x22.5cm
오세창 구장(서울옥션 제공)
삼성미술관 리움에《백사문충공 진적첩白沙文忠公眞蹟帖》이 소장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송시열과 남구만의 발문이 있어서 기준작으로 인정됩니다. 단정하고 소박한 해서체를 볼 수 있습니다.
백사문충공 진적첩 중 老子句(노자 제56장)
이항복 간찰. 22.1x27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