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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산해와 정철
  • 1799      


<이산해 초상> 견에 채색, 161.5x82.7cm, 국립중앙박물관


한산 이씨 명문가 출신인 이산해(李山海, 1539-1609)*는 고려 후기의 대학자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李之菡)의 조카이기도 합니다. 이산해는 북인의 영수였고, 서인인 송강 정철(鄭澈, 1536-1593)**과 함께 당시 정치세력의 양대 산맥 같은 존재였습니다. 송강 정철 뒤에는 윤근수 등이 포진해 있었고, 이산해의 주위로는 유성룡, 퇴계 이황,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정철, 이이(李珥) 등과 이산해는 처음에 친한 사이였지만 자신들의 당파 때문에 차차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산해는 어려서부터 무척 총명해서 신동이라고 불렸습니다. 특히 문장을 잘 해서 선조 때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습니다. 수묵으로 그림도 그리고 글씨를 잘 써서 조광조의 묘비와 이언적(李彦迪)의 묘비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송설체를 즐겨 썼으며 기개가 있고 획이 조금 많은 초서가 특히 좋은데, 황기로와 비슷한 경향이면서 그보다는 획이 다소 두꺼운 편입니다.  


이산해, 제관악산인정각시권


이산해, 고시(오언절구), 71x40cm

이산해, 초서 간찰 1599년 국립중앙박물관


이언적 신도비. 경주시 옥산서원.
중기의 문신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을 기리기 위하여 1586년(선조 19)에 건립한 신도비. 비문은 기대승(奇大升)이 짓고, 글씨는 이산해가 썼다.


이산해, 이언적 신도비 부분


조광조 신도비 부분. 용인시.
용인시 심곡서원 인근에 있는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묘소 신도비. 1585년(선조18년) 건립되었다. 비문은 노수신(盧守愼)이 짓고, 글씨는 이산해가 썼다. 전서는 김응남.


그의 한산 이씨 집안은 약간 독특해서 가족들이 노론과 남인 혹은 북인 등으로 갈라집니다. 이산해의 사촌인 이산보(李山甫, 1539-1594) 쪽은 주로 노론(서인)쪽으로 가고, 이산해 쪽은 주로 남인(북인)으로 갔습니다. 한 집안에 두 계파가 있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긴 하지만 이산해와 이산보의 경우는 완전히 반대파로 나뉘었다고 봐야 합니다. 소설가 이문구는 이산보 쪽의 후손이고,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이문원은 이산해의 직계 후손입니다. 이문원의 증조부인 수당 이남규(李南珪, 1855-1907)는 학자로서는 마지막 남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성균관 선생으로 있을 때의 제자 중에는 단재 신채호도 있습니다.

이산해는 장원급제 이후로 주요 요직을 두루 떠맡으며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 송강 정철이 수많은 동인들을 수년간 탄압했을 때 이산해 또한 크게 곤욕을 치릅니다.

기축옥사의 과정을 정철을 중심으로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의정이 탄핵된 자리에 새로 임명을 받은 정철이 정여립의 역모 사건 조사를 주도하게 됐는데, 정철은 이 사건을 확대하여 자신의 주도 하에 문제가 됐던 정여립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별 물증도 없는 상태에서 동인의 주요 인물들을 탄압했습니다. 이때 죽은 사람이 1천 여 명에 달하고 500여명이 유배를 갔습니다. 억울하게 화를 입은 가문들은 원한을 품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이후 수백 년간 이어지는 당쟁을 유발했습니다. 정철은 당시 좌의정이었던 이산해도 정여립 사건과 연루된 것으로 몰아가려 했으나, 서인들의 지나친 세력 확대에 반발한 선조가 정철을 파직함으로써 기축년에 시작된 긴긴 옥사(獄事)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정철의 초서 시구


정철 시구


송강 정철 초상(원본은 전해지지 않음)


정철의 문학적 업적과 정치적 사건들에 비해 그의 글씨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글씨 또한 유명했는데 특히 초서를 잘 썼다고 알려져 "필력이 힘차고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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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해 : 1558년(20세) 진사, 1561년 식년 문과 병과로 급제. 홍문관정자(명종의 명으로 경복궁대액(景福宮大額)을 씀), 부수찬, 병조좌랑·수찬, 이조좌랑(1565) 등이 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원접사종사관, 이조정랑, 의정부사인, 직제학을 거쳐 사가독서. 1570년 동부승지, 1577년 이조·예조·형조·공조 참의, 대사성·도승지, 1578년 대사간, 1579년 대사헌, 1580년 병조참판, 형조판서로 승진. 이후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제학·대제학·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를 겸하였다.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 무렵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 1589년(51세)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이듬 해 정철(鄭澈)이 세자 책봉 문제를 일으키자 아들로 하여금 정철을 탄핵시켜 강계로 유배시켰다. 한편 이와 관련해 윤두수, 윤근수, 백유성 등 서인의 영수급을 파직 또는 귀양보내고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해 개성에 이르렀으나,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도록 했다는 사간원·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1595년 영돈녕부사 겸 대제학으로 복직. 대북파가 되어 영수로서 1599년 재차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파직되었다가 1601년 부원군으로 복직. 선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맡았다.

**  정철 : 두 누이가 인종의 후궁, 계림군의 부인이어서 어려서부터 궁에 출입했다. 1545년(10세) 때 을사사화에 연루, 아버지와 형이 유배당하고 이후 여파로 맏형이 요절하게 됐다. 아버지의 유배가 풀려나 담양으로 이주, 10여 년을 살면서 임억령, 양응정, 김인후, 송순, 기대승 등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이이, 성혼 등과 같은 선비들과도 알게 된다. 1561년(26세) 진사시 1등, 이듬해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좌랑·현감·도사, 함경도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湖堂 : 젊은 문관 가운데 뽑아 휴가를 주어 학업만을 닦게 하던 서재)에 선출됐다.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암행어사를 지냈다. 40세에 시묘살이를 끝내고 조정으로 돌아갔으나 본격화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담양으로 물러났다. 43세 때 조정에 다시 나아갔는데,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등을 지었다.
그 뒤 전라도, 함경도관찰사 등을 거쳐 48세 때 예조판서, 49세에 대사헌이 됐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고향에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했다. 이때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1589년(54세)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철저히 동인들을 척결,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다. 56세 때 왕세자 책립문제로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 유배됐다.
57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귀양에서 풀려나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으나 동인의 공격으로 사직, 강화 송정촌에 우거하다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SmartK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0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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