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 ~ 1560)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라도 장성 땅에 살다가 열아홉 살에 성균관에 들어가는데, 이때 퇴계 이황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이는 이황보다 9살 어렸습니다. 뒤에 인종이 세자였을 때 그를 가르치는 선생이 된 사람이어서 인종이 하사한 대나무 그림에 제를 쓰기도 했습니다.
인중의 묵죽도. 김인후의 제가 들어 있다. 국립광주박물관.
그의 흔적이 담긴 그림을 한 점 먼저 보겠습니다. 국립광주박물관 소장품인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는 1531년 과거에 급제한 일곱 사람이 11년 후인 1542년에 다시 모인 기념으로 그린 것인데, 이 일곱 사람 중에 김인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필자미상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蓮榜同年一時曹司契會圖> 1542년경, 종이에 먹, 104.5x62cm, 국립광주박물관
그의 글씨는 많이 전해지지는 않지만 초서가 유명하고, 현재 그가 쓴 초서 천자문도 남아 있습니다. 김인후의 글씨는 명필이라고 하기보다는 꼬불거리지 않고 시원시원한 글씨입니다. 황기로 스타일도 양봉래 스타일도 아닙니다.
조광조의 제자로 기묘사화 후 벼슬을 포기하고 내려가 담양에 소쇄원이라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든 양산보(梁山甫, 1503-1557)는 김인후의 친구이자 사돈(김인후의 사위가 양자징)이었습니다. 김인후는 소쇄원을 주제로 한 시 ‘소쇄원 48영’을 짓기도 했습니다. (김인후는 이밖에 이항, 기대승과도 사돈 관계가 됩니다.)
소쇄원의 경영에는 김인후 뿐만아니라 양산보의 이종사촌인 송순(宋純, 1493-1583)도 간여하고 있었는데 송순은 송강 정철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양산보의 소쇄원 부근은 송강 정철(松江 鄭澈1536-1593)의 연고지입니다(식영정).
그러나 정철과 이들은 좋은 운명으로 맺어지지 못했습니다. 기축옥사(1589) 때 정철과 그 집안, 서인들이 앞장서서 정여립 모반 사건을 잔혹하게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철은 역모에 가담한 자를 색출하는 국문의 최고 담당자로 이 기축옥사를 이용해 광산 이씨 등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얽고 선비들을 잡아 넣어 악명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 때 양산보의 소쇄원도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정여립 사건으로 인해 7백~8백명의 선비가 죽었다고 하니 전라도 쪽의 선비가 씨가 말랐다는 얘기가 돌곤 합니다. 그중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은데, 광산 이씨인 이발, 이길 형제, 함안 조씨 동계공파 남명 조식, 정곤재 등등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없었다면 인품과 학식이 뛰어났던 김인후도 조금은 인생이 피고 후학도 남겼을 텐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소쇄원은 정유재란에 불탔다가 김인후의 시, 목판본의 소쇄원도(1755) 등을 바탕으로 후손들이 다시 복원한 것입니다.
사족. 김인후의 후손은 그 이후 그다지 유명해졌던 사람이 없다가 어업 등으로 돈을 많이 벌게 됩니다. 동아일보, 고려대학교를 세운 김성수가 그 집안입니다. 김성수는 그 때 영천의 땅부자인 이활의 도움을 받았고 이활의 딸과 결혼하기도 했습니다. 이활도 고려중앙학원(고려대학교-중앙중학교)의 이사장을 지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