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에 대한 자료는 상대적으로 그 후의 자료들에 비해 턱없이 적습니다. 글씨나 글과 관련된 기록도 마찬가지여서 매우 드물고 퇴계 이황 정도가 예외적으로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위창 오세창 선생이 묶은 『근역서휘』와 『근묵』등의 서첩으로 고려부터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여러 옛 인물들의 필적을 볼 수 있는데, 『근묵』편찬할 때 자료들을 보니 남은 자료들은 거의 경북 안동 쪽의 것이 많았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서울 경기 지방이나 충청 쪽에 남아 있던 자료들은 유실되거나 일본으로 넘어가고, 그나마 경북 쪽은 보존된 자료들이 많이 남았던 것입니다.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필적들은 그만큼 우리에게 귀한 자산입니다. 어렵고 낯설어도 그분들의 글씨와 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되겠지요.
지난번에 재기 넘치는 시로 유명했던 삼당시인들을 얘기했습니다만 이번에는 조선 중기의 4대문장가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한문으로 ‘한 문장’ 했던, 한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대가들인데 이분들의 호를 한 자씩 따 묶어서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네 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월사 이정구 / 상촌 신흠 / 계곡 장유 / 택당 이식
대개 조선 초기부터 잘 나갔던, 좋은 집안의 자손들입니다.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1564-1635)1)는 유명한 연안 이씨 집안 사람입니다. 이정구 후대로 가면서 집안이 더 잘 되어 그 집안에서는 이정구를 중시조 쯤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월사 후대에 문장 글씨로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이명한, 이소한, 그 아래 상자 돌림의 일상, 가상, 유상 등등 연안 이씨의 이름을 날린 이들이 많습니다.
월사 이정구, 서간, 지본묵서 34x38cm, 1602년
월사 이정구는 한석봉을 좋아하여 그를 두둔한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특히 한석봉의 비문을 짓기도 했는데, 그 무렵 한석봉에 대한 평가가 들쭉날쭉 했으나 일목요연한 그의 비명 덕분에 한석봉에 대한 요체가 알려질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석봉의 아들 한민정이 월사에게 찾아가 비문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 비문 안에 한석봉이 중인임이 밝혀져 있습니다.
월사 이정구의 글씨는 송설체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남창 김현성과 친했고 성격이 네 사람 중 가장 원만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문장도 집안도 월상계택 네 사람 중 가장 훌륭했다고 할 만합니다.
상촌 신흠(象村 申欽, 1566-1628)2)은 평산 신씨 김포 사람으로, 월상계택 4대 문장가중 글씨를 가장 잘 썼습니다. 제가 운영하던 문우서림 간판도 상촌의 글씨로 집자하여 만들었습니다. 그는 특히 행서에 능했습니다. 상촌의 두 아들 신익성과 신익전도 글씨를 잘 썼습니다. 신익성은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와 결혼하여 선조의 사위가 되었지요. 상촌 자신의 장인은 청강 이제신입니다.
상촌 신흠, 서간, 지본묵서 69.7☓33.6cm
신흠은 시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주역에도 밝았습니다. 격언집도 많이 남아 있는데 <상촌야언> 같은 경우는 친필을 집자하여 만든 책입니다.
계곡 장유(谿谷 張維, 1587-1638)3)는 성격이 약간 별났다고 합니다. 양명학, 경학에 밝았으며 <계곡만필>이라는 수필집도 남아 있습니다. 상촌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글씨 또한 잘 썼습니다.
계곡 장유 <舟中作> 지본묵서 31x52cm
그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목숨을 바친 것으로 유명한 우의정 김상용(선원 김상용)의 사위이기도 하고,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효종의 장인이라는 것이지요.
장유의 장인인 선원 김상용에 대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 또한 글씨를 잘 썼고 특히 예서로 유명했습니다. 아랍 사람처럼 매부리코에 부리부리한 외모였고, 담배를 잘 피웠다고 합니다. 당대 최고의 애연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강화도에서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한 것에 대해 누군가는 분신한 것이 아니라 담뱃불로 인한 실화(失火)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있었지만, 순절했다고 보는 견해가 더 많습니다.
계곡 장유의 경우 그 자손에게서 뚜렷이 어떤 성과가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아들 장선징이 글씨를 잘 썼다고는 하지만 크게 이름나지는 안았습니다. 유명한 삼전도비三田渡碑4)의 비문 글을 처음에는 장유가 쓰도록 했으나 비문을 짓는 과정에서 몇 번 묘하게 지어 올렸다가 거절당하고 결국은 백헌 이경석이 다시 지었습니다. 삼전도비에 새겨진 글씨는 당대의 명필 오준(吳竣)이 쓴 것입니다.
택당 이식(澤堂 李植, 1584-1647)5)은 덕수 이씨 가문 사람으로, 글씨로만 보자면 오종종하고 꼬불꼬불하여 잘 쓴 글씨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덕수 이씨 집안은 크게 무인 계통과 문인 계통으로 집안이 나뉘는데, 무인 집안의 대표가 이순신이라 할 수 있고, 문인 집안의 대표가 시문에 뛰어났던 동악 이안눌(東岳 李安訥, 1571-1637)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택당 이식은 동악 이안눌의 조카입니다.
택당 이식, 서간, 지본묵서, 66.0☓26.0cm, 1647년
택당 이식과 그 집안은 명나라 관계된 외교문서를 잘 썼고 그것이 자료로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가 알려진 데에 큰 역할을 한 것이 이 외교문서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택당은 법도에 맞게, 틀을 따르는 글씨를 잘 썼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잘 썼다 못 썼다 하는 글씨의 평가기준이 되는 것이 그 개성보다는 전통적 법도를 따르는지의 여부가 강했습니다. 비문 글씨나 외교문서를 잘 쓰는 사람을 높이 평가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외적인 경우라면 초서인데, 초서만은 개인의 자유도가 커서 개성이 있는 글씨를 높게 평가했고, 또 그만큼 초서를 많이 쓰는 사람들은 그 개성이 잘 드러났습니다.
네 사람의 문장은 다 특색이 있어서 비교가 어렵습니다. 글씨를 평가한다면 상촌>계곡>>월사>>택당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월사 이정규와 택당 이식은 중국어에 능통했다는 공통점이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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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사 이정구 : 임진왜란 이듬해 명나라 송응창의 요청으로 《경서(經書)》를 강의하기도 했다. 병조참지와 부제학을 겸하다가 1598년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나라에 가서 그를 파직시켰다. 1608년 병조와 예조판서를 역임하였으나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이후 형조판서, 예조판서에 다시 이르고 이괄(李适)의 난에는 왕을 공주로 호종, 1627년 정묘호란 때 병조판서로 왕을 강화에 피난하였다. 1628년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2) 상촌 신흠 :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승사랑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외숙인 송응개가 이이(李珥)를 비판하는 탄핵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 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부터 이이의 사람이라는 배척을 받아 겨우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예문관봉교·사헌부감찰·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동인의 배척으로 양재도찰방에 좌천되었으나 전란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삼도순변사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다. 이어 도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그 공로로 지평에 승진되었다. 이조좌랑, 함경도어사, 의정부사인을 거쳐 성균관사예·홍문관전한 등을 역임하였다. 1599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신익성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되어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이후 예조참판·병조참판·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도승지·예문관제학·병조참판·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04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병조판서·예조판서·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9년 세자의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1610년에는 동지경연사·동지성균관사·예문관대제학을 겸대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다시 논죄된 뒤 춘천에 유배되었으며, 1621년에 사면되었다.
1623년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에 중용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다.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오른 후 죽었다.
3) 계곡 장유 :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에 녹훈되고 예조·이조의 낭관, 대사간·대사성·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이듬해 신풍군(新豊君)에 책봉, 이조참판·부제학·대사헌 등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에 강화로 왕을 호종하였다. 그 뒤 대제학 동지경연사를 겸임, 1629년 나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음 해 대사헌··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이후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부음(訃音)으로 18차례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했고, 장례 후 과로로 병사하였다.
4)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머무르던 인조가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석촌동)에 마련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항복한 치욕적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청 태종의 공덕을 새긴 비로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5) 택당 이식 : 1610년 문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이르렀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은거한 후 수차례에 걸친 왕의 출사(出仕) 명을 계속 거부하여 왕명을 어겼다 하여 구속되기도 했다. 인조반정 후 이조좌랑·예조참의·동승부지·우참찬, 대사간·대사성·좌부승지 등을 지냈으며, 1633년 부제학을 거쳐 대제학과 예조참판·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42년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심양으로 잡혀갔다가 탈주하여 돌아왔다. 이후 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1647년 택풍당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