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선조 때에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던 문인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려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간 우리 땅의 시인들, 그러니까 한문으로 시를 쓰는 사람들은 중국 송宋나라의 시풍을 따랐는데, 이 세 사람은 이러한 풍조 대신 두보, 이태백 등 당唐나라의 시 풍조를 따랐기 때문에 붙은 별칭입니다. 이 세 사람은 백광훈 · 최경창 · 이달입니다. 이들은 시를 잘 썼고 자연스레 글씨도 많이 쓰고 남겼습니다.
옥봉 백광훈
전기 시인 중에서 시서화, 그 중에서도 시와 서를 모두 잘 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으로 앞에 한번 등장했던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1537∼1582)을 먼저 꼽을 수 있습니다. 백광훈의 집안은 사실 그리 대단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해미 백씨인데 그 집안 자손들이 전남 해남 언저리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후손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듯하나 백광훈의 후손을 만나 그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교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백광훈의 아들 송호松湖 백진남白振南이 특히 시도 잘 쓰고 글씨를 잘 써서 그 부자父子가 널리 알려졌고, 손자 백상빈, 백상현 때까지 글씨를 잘 썼던 것으로 전해지며, 형인 백광안白光顔과 백광홍白光弘 등도 모두 문장이 좋은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백광훈, 7언시
백광훈의 아들 백진남은 시를 잘 써서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 막하에 중국의 무인들이 와 있을 때 그가 백의종군하여 중국 무인들을 상대로 시도 짓고 술도 함께 마시는 등 중국 손님들을 접대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들을 ‘접빈사接賓使’라고 불렀는데, 백진남이 시를 잘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지요. 조선 전기에는 시를 잘 지어 보수 없이 접빈사 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중국 사신들이 왔을 때 우리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실력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작酬酌하게 한 것인데, 벼슬을 하지 않았더라도 시를 잘 짓는 사람들이 주로 그런 접빈사 역할을 했습니다. 아버지 백광훈도 접빈사 역할을 했고, 조금 후에 언급될 손곡蓀谷 이달李達이나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등도 그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백광훈은 접빈사를 했다 뿐이지 벼슬을 못했습니다. 대과를 못해 벼슬은 포기한 것입니다.
백광훈 부자의 글씨는 초서나 정자나 왕희지를 기본으로 해서 조맹부, 동기창으로 내려오는 정통파 글씨, 모범이 되는 글씨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서, 해서, 초서가 모두 FM인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그런데 글씨의 형태는 부자가 비슷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에 비해 글씨의 힘이 약합니다. 백광훈이 남긴 문집으로 『옥봉집』이 있고, 그 외에 자손들이 백광훈과 주위 친구들의 글씨를 받아 서첩을 낸 것도 남아 있습니다. 이 서첩을 보면 지난 번에 말했던 것처럼 강릉의 신사임당 글씨로 알려진 것이 신사임당이 아니라 백광훈 글씨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백광훈 하면 행서 글씨가 대표적입니다. 황기로나 양봉래는 초서를 잘 쓰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특히 황기로의 경우는 해서 글씨는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만약 있다고 해도 재미있는 글씨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이 되죠. 초서가 워낙 독특했던 매력이 있어서 유명한 것이었으니까요. 석봉 한호는 해서를 잘 쓰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행서와 초서도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해서가 너무 좋은 나머지 행초가 묻힌 셈입니다. 미수 허목 같은 경우 그의 전서와 해서를 보면 둘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서와 해서는 전혀 다른 맛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건 어느 정도는 붓의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초서를 쓰면 붓의 길이를 어디까지 이용하느냐 등에 따라 전혀 다른 모양새가 나오기 때문에 천차만별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죠. 붓 끝만 이용하는 하수가 있고, 눌러서도 뉘어서도 쓰다가 재빨리 일으켜 휙 속도감 있게 쓸 수도 있습니다. 끊어쓰는 부분 없이 길게 쓴다든가 속도감 있게 쓰면서도 붓이 갈라지거나 획이 끊어지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은 또 쓰는 사람의 기술 뿐 아니라 붓의 성능에 따라서도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겁니다. 힘이 있고 좋은 글씨가 나오려면 물론 좋은 붓을 써야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붓을 쓴다고 하더라도 그 성능을 다 이용하지 못합니다. 대개 수축이 잘 되어 탄력있게 빨리 일어나고 강한 것을 좋은 붓이라고 여깁니다. 붓을 강하게 만들어 힘있게 쓰기 위해서 칡뿌리를 사용한 경우도 있습니다. 붓의 털의 성능에 따라 강호(强毫)다 약호(弱毫)다 하는 것이 그러한 기능의 구분입니다.
고죽 최경창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은 무인 집안으로, 아버지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영변대도호부사 등을 역임한 최수인이었고 그의 아들 최운서는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최경창은 무예도 뛰어났지만 학문과 문장에 능해서 그의 나이 서른에 문과에 급제하기도 했습니다. 율곡 이이는 그의 시가 ‘새롭고 산뜻하여 재기가 뛰어나다’고 평한 바 있습니다.
최경창, 서간
이 사람은 홍랑이라는 유명한 기생과의 유명한 일화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경창이 삼십 대에 함경도 북평사로 가면서 처음 홍랑을 만납니다. 그곳 관기官妓였던 홍랑은 재색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도 뛰어났습니다. 그곳에 부임한 최경창과 홍랑은 금방 글이 통하고 마음이 통해 2년여 간 꿈같은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최경창이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귀임할 때 관기의 신분인 홍랑은 함관령(咸關嶺)까지 배웅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 홍랑은 그와 헤어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묏버들’이라는 시조를 남깁니다.
“묏버들 갈혀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데/ 자시는 창밧괴 심거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곳 나거든 나린가도 녀기쇼셔.”
한양으로 돌아간 최경창이 병석에 있다는 소식을 3년 만에 듣게 된 홍랑은 그 날로 밤낮 7일을 걸어 한양에 당도해 고죽의 병수발을 들었으나, 이 때문에 최경창이 파직이 되고 맙니다. 이후 복직되기는 했으나 여러 고을로 전전하다가 45세에 상경 도중 종성 객관에서 생을 마치게 됩니다. 홍랑은 파주에 있던 그의 무덤 곁에 묘막(墓幕)을 짓고 3년간 시묘를 살았고, 이후 임진왜란이 터지자 홍랑은 고죽의 시첩을 가지고 함경도로 피신하였다가, 임란 이후 다시 움막으로 돌아와 살다 죽었다고 합니다.
최경창의 글씨는 백광훈보다는 조금 떨어진다고 보아야 합니다.
최경창, 자작시, 42x25cm, 오세창 구장
최경창 글씨에서 부족한 것이 전체적인 짜임새의 일목요연함입니다. 書에서는 글자 하나하나를 잘 쓴다 못 쓴다보다 중요한 것이 전체적 짜임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작할 때와 마무리가 엉성하면 잘 쓴다고 할 수 없죠. 백광훈은 똑소리나지만 말입니다. 또 잘 쓰는 사람은 항상 같은 글씨를 쓰지만 못 쓰는 사람은 쓸 때마다 다른 글씨가 나옵니다. 물론 일부러 다르게 쓰는 경우도 있지만, 같게 쓰려고 하는데도 컨디션마다 다른 결과가 나온다면 아직 완성된 글씨라고 볼 수 없는 것이죠. 추사의 경우는 특이하게도 사람 인(人)이든 뭐든 한 글자를 한 폭의 글 내에서 같은 모양으로 쓰고 싶을 때는 다 똑같이 쓰고 다르게 쓰고 싶을 때는 열 개를 다 다르게 씁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그렇게 쓸 수 있는 사람은 추사밖에 없다고 해야겠지요. 사실 추사 이전의 사람들은 모든 글씨체에 통달해서 잘 쓰려고 하기보다는 한 가지 글씨체를 완성하여 잘 쓰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손곡 이달과 허균
손곡蓀谷 이달李達(1539-1612)의 글씨는 오종종한 단점으로 최경창보다도 조금 낮게 봅니다. 이달의 글씨는 많이 남아 있지 않아 귀한 편입니다.
이달, 시, 『근묵』, 1598, 초서, 26.5×26.5㎝,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이달의 제자 중에 유명한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가 있습니다. 이달은 서자 출신으로 당시의 서자는 양반으로 여겨지기는커녕 일반 서민보다도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 삼당시인 중 시로만 보자면 가장 뛰어난 시를 지은 이가 손곡 이달입니다. 그는 원주 손곡리 출신으로,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강원도 간찰사였어서 허균이 자주 원주로 이달을 찾아간 기록이 있습니다. 이달은 벼슬을 할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전국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평양의 한 여관에 얹혀살다 자식도 없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무덤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난설헌 허초희, 앙간비음도
사실 허균의 형인 허봉이 이달의 친구였습니다. 허봉이 생각하기에 허난설헌의 재능이 아깝고 허균은 똑똑한데 건방져서 자신 뿐 아니라 누구 말도 잘 듣지 않아 이달을 소개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어린 허균이 이달의 허름한 옷차림을 보고 얕잡아보아 막 대했으나 그의 시를 읽고는 깜짝 놀랐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후에 그는 스승인 손곡 이달의 시를 따라올 이는 아무도 없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허균은 본인 자신도 시를 잘 짓기는 하지만 『국조시산』(허균이 편찬한 시선집) 등을 보면 시를 보는 안목이 뛰어난 평론가였습니다. 그런 그가 가장 존경했던 스승이 이달이었던 것입니다.
허균, 시
허난설헌의 오빠이자 허균의 형인 허봉은 선조 때 명나라 주지번이 사신으로 조선에 와 접빈사를 했던 사람입니다. 이달이 허봉의 친구였기 때문에 함께 접빈사로 갔었던 것 같습니다. 이달은 이태백의 시를 모두 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가 당시 풍으로 좋아질 수 있었던 것이었겠지요.
허균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볼까요? 허균의 아버지 허엽에게는 첫 번째 부인에게서 난 큰아들 허성이 있었고, 봉, 균, 초희(난설헌) 세 남매는 두 번째 부인에게서 얻었습니다. 첫 번째 부인이 죽고 나서 허균의 어머니가 정실부인이 되기는 했지만, 허균은 서자에 대한 동류의식이 강했고 콤플렉스 또한 컸던 사람입니다.
허균의 글씨는 꼬불꼬불하고 날아다니는 듯한 글씨체인데, 독특하게도 전서를 잘 쓰기도 했습니다. 명나라 때 기인인 이탁오의 글에 영향받아 허균의 『한정록』에는 그러한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국조시산』등을 펴내고 허봉, 이달의 시집도 펴냈으며 누이 난설헌의 유작 시들을 모아 문집을 만들기도 하는 등, 비평과 출간계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