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수, 范氏心箴, 지본묵서, 29X17cm, 1647년
조문수, 哀江頭, 지본묵서 첩, 29X17cm, 1647년
조문수는 과거에서 문과 을과 즉, 2레벨로 급제를 하고, 호조판서, 강원도간찰사 등을 지낸 조선 중기의 문인입니다. 18세기 후반 초서와 예서 등 글씨를 잘 써 서사관書寫官을 역임했던 조윤형(曺允亨 1725(영조1)-1799(정조23))의 선조가 됩니다. 이 창녕 조씨 집안에는 예로부터 글씨를 잘 쓰는 사람들이 많아 “조씨무둔필(曺氏無鈍筆)”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조문수와 조윤형 외에도 조명교, 조윤정, 조석우 등의 글씨가 유명했습니다.
조윤형의 글씨
증손자인 조하망은 자신의 문집(서주집)에서 자신의 증조할아버지 조문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써 놓았습니다.
본래 송설체를 좋아했으나 그 색태가 너무 곱고 예쁜 것을 싫어하여 다만 꺾어진 마디와 살이 이어댄 곳만을 취하고 거기다가 왕희지의 청진淸眞한 뜻을 혼합했으니, 그 글씨의 체와 기운이 무르녹고 순수하며 파임과 지게다리가 유동하여 종이를 펴 놓고 글씨를 쓸 적에 바람과 비가 몰아치는 듯하여 크고 작은 해서와 초서가 각각 그 극진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 때에 남창 김현성과 동회 신익성 같은 분들은 모두 순전한 송설체만을 썼기 때문에, 서로들 하령군(조문수)에게 칭찬을 돌리기를 “설정은 왕희지와 조맹부 사이를 절충하여 우리들로서는 미칠 바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스스로는 그다지 장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팔방에서 글씨 써 달라는 사람이 비단을 가지고 와 상자와 농에 가득 쌓여서 이루 다 응수할 수가 없게 되었으나, 일찍이 자기 집안에 전해내려가는 글씨라곤 남겨놓지 않았다.
근역서화징에서 오세창은 그 뒤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조문수는) 붓을 댐에 맑고 깨끗한 취미는 없으나 해서가 초서보다 낫게 되었다. 그 뒤에 대대로 글씨 잘 쓰기로 이름난 자는 강씨와 조씨 두 집이 있는데 조씨가 강씨보다 낫다.
조문수의 해서가 초서보다 좋다는 것이죠. 이 얘기는 그의 초서가 선이 분명치 않은 면이 있어서 오히려 정자로 쓰는 해서가 낫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강씨는 진주 강씨, 즉 표암 강세황(1713-1791), 강세황의 아버지인 백각 강현(1650-1733), 할아버지인 설봉 강백년(1603-1681), 복천 강학년(1585-1647), 죽창 강주(竹窓 姜籒1567-1651) 등의 집안을 말하는데, 조씨와 쌍벽을 이루지만 글씨가 거의 비슷하고 변화가 없습니다. 표암 집안을 얘기할 때 나오겠지만, 그 집안의 글씨는 표암 윗대 뿐만 아니라 강완, 강빈, 강이천, 강이오 등 후손들도 글씨가 똑같아서 고종 때의 자손까지도 표암 글씨와 유사합니다. 그래서 조씨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나 봅니다.
강세황, 書論, 21.7x101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