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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기의 명필 1 - 남창 김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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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원나라 조맹부의 서체인 송설체는 안평대군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의 많은 사람들의 글씨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조선 중기에 율곡 이이와 같은 때 과거시험에서 급제를 한 ‘동방급제’ 사이인 김현성1)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글씨도 전형적인 송설체로, 당대의 송설체로는 가장 유명한 분이라고 보면 됩니다. 


김현성 <心經贊> 지본묵서 책 각각 33.5x21.5cm,『南窓楷眞』


김현성은 1542년 생으로 1543년생인 석봉 한호와 나이가 비슷합니다. 동방급제를 한 이이는 1536년생입니다. 조선 중기의 과거 시험에서는 갑(甲)이 3명, 을(乙)이 7명, 나머지 23명을 병(丙)과로 성적을 내는데, 그 시험에서는 율곡 이이가 갑의 일등, 즉 장원 급제를 했고 남창 김현성은 병과에 들었습니다. 이 때의 병은 무사의 병(兵)과 상관없는 구분입니다. 

과거 시험에서 특출한 기량을 보이는 사람에게 벼슬을 주기 위해 갑을병의 구분을 한 것이죠. 중국의 과거시험과 조선은 용어상 조금 다른데, 중국에서는 ‘진사’라는 과거시험이 우리나라에서 ‘대과’에 해당하고, ‘거인’은 우리나라의 ‘소과(진사나 생원을 뽑는 시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은 진사를 별로 뽑지 않아서 진사로 벼슬하는 사람들을 더 높게 쳐 주었습니다. 우리는 대과를 3년에 한 번 치르고, 대신 별과는 거의 매년 치렀습니다. 증광시 등 다양한 임시 채용 시험을 보도록 했던 것이죠. 

남창은 율곡과 동방급제한 분이지만 말하자면 별볼일없는 양반이라 해야 할까요, 크게 벼슬을 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글씨를 잘 하고 시 등 글을 잘 써서 유명했습니다. 이 양반의 제자가 『어우야담』으로 잘 알려진 어우 유몽인2)입니다. 예전에 한글큰사전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신 한글학회의 유재한 선생에게서 어우야담 책 묶어놓은 것을 제게 주신 적이 있습니다. 고흥 유씨인 유재한 선생이 한국전쟁 때 보따리에서 발견하여 가지고 계시던 것을, 유몽인의 스승인 남창 김현성과 같은 김해김씨 집안의 후손에게 준 셈이었습니다. 유재한 선생의 경우 한글운동을 하셨지만 한문을 잘 알고 잘 쓰시는 분이었습니다. 바짝 마르고 신선같은 기골이셨는데, 언젠가는 인사동 한 필방에서 대개들 한자로 쓰곤 하는 어려운 상량문을 한글로 하여 쓰고 계신 것을 뵌 적도 있습니다. 이밖에 한글학자였던 부산대 박지용 교수님도 한문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당시의 지식인이라면 한문을 잘 알고 있어야 한글도 잘 이해하고 교육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악가 한갑수 씨도 고운말 바른말쓰기 등의 한글 운동을 했었고, 조선왕조실록을 세 번 읽었다고 자랑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60-70년대 국어학자였던 양주동 박사는 인기 프로였던 “유쾌한 응접실”에 단골로 나와 라디오 스타가 되기도 하셨죠. 

다시 남창 김현성 선생으로 돌아와볼까요? 남창 선생의 글씨를 들여다보면 글씨가 반듯하고 유려한데 송설체치고 힘이 조금 없는 느낌이 듭니다. 아마 남창 선생 자신이 성격이 유하고 사람이 좋았던 게 아닐까, 그게 글씨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창 선생이 벼슬했을 때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점들이 좀 드러납니다. 너무 사람이 좋아서 지방 군수로 갔을 때 사람들이 그렇게 아전들이 몰래 해먹었다고 합니다. 김현성 군수는 들러리로 세워 놓고 말이죠. 군수가 물러터지면 아랫사람들이 마음대로 자기 배를 불리곤 한 모양입니다.  ‘백성을 사랑하기는 아들같이 사랑하는데, 창고는 늘 비어있다’는 이야기가 집안에 내려온다고 합니다. 후손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김현성의 묘소는 고양시청 옆에 있다고 하는데, 누가 파헤쳤는지 가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묘지명은 벗이었던 지봉 이수광이 지었습니다.  


남창잡고


당신이 시를 직접 적어놓은 시들이 있었는데 제자 오숙3)이 황해도 관찰사를 지낼 때 김현성의 친필을 판각하여 『남창잡고』라는 문집을 만들어서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렇듯 친필을 판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밖에 시로 유명했던 사람은 유몽인의 조카(생질)인 성여학4) 등이 있었는데, 김현성, 유몽인, 성여학 등등이 기록에 함께 등장합니다. 

  남창 김현성은 양반이고 석봉 한호는 중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다른 양반들이 둘을 부를 때, 남창은 ‘김공’으로 부르고 석봉은 ‘한군’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한석봉이 워낙 글씨로 잘 알려져 글씨 쓸 일에는 으레 그를 불렀고, 특별한 일이 있으면 ‘김공’도 불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석봉이 워낙 유명했지만 출신에 따른 차별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석봉은 송설체에 왕희지체를 합친 글씨라고 할 수 있고 남창 김현성은 송설체만 써서 다른 점이 많이 보입니다. 남창의 글씨에 단점이 있다면 전해지는 여러 작품들 가운데 좋은 글씨와 떨어지는 글씨의 차이가 크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는데, 석봉 한호의 경우는 작품마다의 수준차가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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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창 김현성(南窓  金玄成, 1542(중종37)-1621(광해군13)) 관직은 양주목사 등을 거쳐,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시·서·화를 두루 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특히 글씨와 시를 잘 했다고 한다. 행서(行書)로 쓴 「주자시(朱子詩)」, 금석문으로는 「숭인전비문(崇仁殿碑文)」·「이충무공수군대첩비문(李忠武公水軍大捷碑文)」·「조헌순의비문(趙憲殉義碑文)」·「신숭겸충렬비문(申崇謙忠烈碑文)」·「정언유격묘비문(正言柳格墓碑文)」 등 다수의 작품이 전하고 있다. 

2) 유몽인(柳夢寅, 1559~1623) 성혼(成渾)과 신호(申濩)에게서 수학했으나 경박하다는 책망을 받고 쫓겨나 성혼과는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1589년 증광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592년 수찬으로 명나라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다녀오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를 평양까지 호위했다. 왜란 중 대명 외교를 맡았으며 세자의 임시 조정에도 따라가 활약하였다. 그 뒤 병조참의·황해감사·도승지 등을 지내고 한성부좌윤·대사간 등을 지냈으나 이후 도봉산 등에 은거하여 1623년 인조반정 때 화를 면했으나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광해군의 복위 음모로 무고당하여 국문을 받고 아들과 함께 사형되었다. 외교가이면서 전서·예서·해서·초서에 모두 뛰어난 서예가였다. 

3) 오숙(吳䎘 1592(선조 25)∼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4) 성여학(成汝學 ?-?) 조선 중기 때의 문인. 이수광과는 절친한 시우(詩友)였다. 50여세가 되어서야 사마시(司馬試)에 합격되어 벼슬은 별좌(別坐)에 그쳤다.

김영복 관리자
업데이트 2024.10.01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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