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에 흘림체 글씨인 초서의 3대가가 있습니다. 바로 김구, 양사언, 황기로인데 이들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시대를 나눌 때 임진왜란(1592년)을 그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1600년 이전을 전기라고 보기도 하고, 안휘준 선생은 1550년까지를 전기로 봅니다. 이 세 사람은 시기적으로 거의 비슷한 때 전기에서 중기에 걸쳐 활동했으나 전기의 인물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조선 전기에 남아 있는 서예 작품이 워낙 적고 확인하기 쉽지 않지만, 전기에 그 세 사람이 글씨를, 특히 초서를 잘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자암 김구(金絿, 1488(성종 19)~1534(중종 29))1)
먼저 김구의 경우는 전해지는 글씨 자료가 거의 없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중종 때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조광조 등의 사림을 ‘기묘명현’이라고 하는데, 김구도 이에 포함됩니다. 광산 김씨이기는 하지만 흥하지 못한 파에 속하고 후손들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글을 잘하여 문과, 대과에 장원했던 똑똑한 사람인데, 조광조와 친했던 바람에 귀양을 오래 하게 되었고, 귀양 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애처로운 이야기도 전해집니다.2)
자암 김구의 글씨는 매우 독특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초서와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김구(金絿, 1488~1534) <증별시>
경북 봉화에 있는 권벌의 종가에 전해지고 있는 이 작품은 권벌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었던 1519년 6월에 예조판서로부터 삼척부사로 좌천되면서, 증별의 의미를 담아서 쓴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당나라 왕발王勃의 오언율시 「설화와 이별하며別薛華」를 쓴 것이다.
김구 <희우정기> 《자암서법自庵書法》1532
《자암서법自庵書法》은 1532년 경에 쓴 김구의 글씨를 외현손 안응창의 주관하에 1664년에 모각하여 간행한 서첩으로, 초서로 쓴 〈희우정기喜雨亭記〉와 해서로 쓴 〈화명和銘〉, 〈유예재명游藝齋銘〉이 수록되어 있어 해서와 초서를 동시에 살필 수 있다. 진주정씨 우복종택에 소장.
왕희지 글씨체와는 거리가 있고 명대의 초서체를 받아들인 경향이 있습니다. 당시에 초서가 활발하게 쓰이고 발달한 것은 명나라 장필의 글씨의 영향인 바가 큰데, 김구는 그의 글씨를 전체적으로 다 받아들이지 않고 조금 다르게 변형했습니다. 위아래의 글자가 연결된 연면체를 주로 사용하며, 전반적으로 강하며 강약의 차이가 크지 않고 둥글둥글합니다.
김구는 서울 서대문 인근에 있던 인수동에 살았었기 때문에 그의 글씨를 인수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은 작품이 많지 않은데다 후대에 영향을 주지 않아 단절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세 사람 글씨 중 후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황기로의 글씨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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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는 자암(自庵). 1515년 홍문관·수찬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홍문관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1519년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1519년 11월 기묘사화로 개령에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뒤에 죄목이 추가되어 남해로 이배되었다. 남해에 이배된 지 13년 만에 임피로 가깝게 옮겼다가, 2년 뒤에 풀려나와 고향인 예산으로 돌아왔으나 병을 얻어 죽었다. 일찍부터 성리학 연구에 전념해 학문 실력이 조광조·김식과 겨눌만했다 한다. 글씨에도 뛰어나 안평대군 용(安平大君瑢)·양사언(楊士彦)·한호(韓濩) 등과 함께 조선시대 전기 서예계의 4대가로 손꼽히기도 한다. 서체가 매우 독특해 그가 살았던 인수방의 이름을 따서 ‘인수체(仁壽體)’라고 했으며, 중국 사람들까지도 그의 글씨를 사갈 정도였다고 한다.
2) 십여 년의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온 김구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사실을 알고, 부모의 산소에 가서 통곡하다 기절하였다고 한다. 아침저녁으로 산소에 가서 통곡하여 풀이 다 말라버렸으며 이 때문에 병을 얻어 그 해에 죽고 말았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