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송설체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정리해 보자면 왕희지 풍의 부드러움 속에 송대의 황정견이나 미불의 영향으로 힘이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정리해 보자면 왕희지 풍의 부드러움 속에 송대의 황정견이나 미불의 영향으로 힘이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황정견의 글씨
왕희지의 글씨(黃庭経(經))
개인적으로는 미불의 내리긋는 힘에 왕희지 글씨의 짜임새를 더한 것이 송설체라고 생각합니다. 송설체는 글씨에 힘이 있고 짜임새와 품격이 있습니다. 가히 왕가의 글씨라고 부름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글씨 자체가 넉넉하면서 획이 가늘지 않고 튼실합니다. 유려하고 힘있고 기품있고 품격있는 글씨로, 품격과 멋으로 따지면 단연 탑(top)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송설 조맹부의 시경
안평대군 글씨의 판본을 보면 제작방법의 한계 때문인지 대개 살이 너무 많은데, 원본은 그것보다는 미려할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지장경 글씨를 보면 곱고 아름다우면서도 힘이 있고 쭉쭉 뻗습니다. 길 도(道)자 등에서 볼 수 있는 받침이나 사람 인(人), 갈 지(之)자 등에서 보이는 삐침에 힘이 넘쳐납니다.
안평대군(좌)과 조맹부(우)의 글씨(쌍구본)
안평대군의 지장경 글씨
송설체는 그 품격이나 기술 면에서 안평대군의 품성과 기량과 잘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평대군의 컬렉션 목록을 보면 그가 행서나 묵죽 등의 조맹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몇 점 정도가 아니라 자그마치 26종입니다. 조맹부의 것을 있는 대로 거의 다 모았다고 할 만합니다.
안평대군 컬렉션(안휘준,『안견과 몽유도원도』, 사회평론, 2009 중)
훈민정음 글씨는 전형적인 송설체로 훈민정음이 반포될 때는 1446년, 안평대군이 스물아홉 살일 때입니다. 그의 서른여섯 인생에서 이름이 그 정도 났다면 29세에는 이미 글씨로 이름을 드날렸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스무 살 무렵부터 글씨로 이름을 날리지 않았을까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훈민정음에 그의 손을 빌릴 만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는 100퍼센트 심증이 있습니다. 누가 훈민정음을 썼는지 이야기되는 바가 없는 것이 이상합니다. 아마도 세조가 정권을 잡으면서 자연스럽게 묻혀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안평대군이 썼다고 전해지는 천자문도 있으나, 그것은 격이 다소 떨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나이에 따라 글씨는 다소 다를 수 있겠지만 확신하기는 어렵다고 여겨집니다.
경오자
조선 초기에는 당대에 좋은 해서를 가진 사람 3대 명인의 글씨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는데, 안평대군의 경오자, 강희안1의 을해자, 정난종2의 을유자가 그것입니다. 안평대군의 경오자는 경오년 즉 1450년 문종 즉위하던 해에 만들어진 것이고 을해자는 1455년, 을유자는 1465년에 제작된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은 당대에 송설체를 잘 썼던 것으로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이 중 정난종의 글씨가 힘이 약하고 다소 떨어진다고 볼 수 있고, 강희안의 글씨는 안평대군과 맞먹을 정도의 수준을 보입니다. 안평대군은 유명하여 그의 글씨 탁본이 많이 전해지고 있는 반면 강희안 글씨는 구하기 힘들어서 아직 원본이라 여겨지는 친필을 보지 못했습니다.
을유자가 정난종의 글씨임이 밝혀진 데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간 을유자는 누구의 글씨인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역사학자 이인영(李仁榮, 1911∼) 씨는 조선 초기 한중 관계를 연구하다가 서지학의 필요성을 느껴 여러 글씨 판본을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봉선사에 있는 세조 때 제작했던 범종의 정난종 글씨가 을유자 글씨와 같음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서지학에서도 금석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죠. 이것이 1960년대의 일이니 을유자가 정난종의 글씨임을 알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을해자 본 <주자대전>
을유자가 정난종의 글씨임이 밝혀진 데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간 을유자는 누구의 글씨인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역사학자 이인영(李仁榮, 1911∼) 씨는 조선 초기 한중 관계를 연구하다가 서지학의 필요성을 느껴 여러 글씨 판본을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봉선사에 있는 세조 때 제작했던 범종의 정난종 글씨가 을유자 글씨와 같음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서지학에서도 금석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죠. 이것이 1960년대의 일이니 을유자가 정난종의 글씨임을 알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을유자 (정난종) 봉선사 범종의 글씨(정난종)
안평대군의 큰형인 문종의 글씨는 남은 것이 많지 않지만 열성어필3이나 해동명적4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안평대군에게는 조금 떨어지나 세조와는 막상막하로 잘 썼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안평대군의 큰형인 문종과 둘째형인 수양대군 즉 세조는 세 살 차이이고, 안평대군은 세조보다 한 살 어린 동생입니다. 문종이 장자로서 의미가 있고 덕망이 훌륭했기는 하지만 여러 면에서 재주는 안평이 뛰어났던 듯합니다.
문종의 글씨
세조의 글씨와 정축자
세조는 그 전에 1455년 을해자(강희안 글씨)를 만들 때, 안평대군의 글씨인 경오자 활자를 녹여서 만들기도 했습니다. 안평대군의 글씨를 녹여 없앨 정도로 세조는 동생을 미워했던가 봅니다.
안평대군이 송설체의 대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재주도 뛰어나지만 오랜 시간 연습한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글씨가 잘 쓰기가 의외로 어려워서, 글씨 공부를 할 때 종이에 기름칠을 해 투명하게 만들고, 글씨 위에 그 기름종이를 대고 본을 떠 연습하곤 합니다. 글씨 가장자리를 선으로 그리고 그 안에 먹을 채워 쓰면서 익히는 방식인데, 이를 쌍구전묵(雙鉤塡墨)이라고 합니다.
몽유도원도 발문에 나오는 집현전 학사들 즉 신숙주, 박팽년 등의 글씨를 보면 전문으로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서 안평대군 만한 짜임새는 없습니다. 당시의 선비나 학자, 문인들이 웬만하면 글씨를 잘 썼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글씨라는 것이 쉽게 경지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송설체라도 어떤 글씨는 조금 더 동글동글하고 어떤 글씨는 더 길고 하는 개인차가 물론 있습니다. 정란종 글씨 같은 경우가 살이 좀 있는 특징을 보입니다.
안평대군 글씨는 세종대왕 영릉에 신도비로도 남아 있습니다. 왕의 신도비는 세종의 것이 마지막이고, 그 이후에는 왕의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종 영릉신도비
안평대군 더 많은 일화가 궁금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근역서화징에 나온 정도가 고작입니다. 수양대군이 그에 대한 기록을 막지 않았다면, 그의 일화든 작품이든 수장품이든 도장이든 이렇게까지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혹은 임진왜란 같은 큰 전란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앞으로라도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기를 기대해 봅니다.
조선 전기에 이어서 이 송설체는 남창 김현성(율곡 친구 유몽인의 스승), 설정 조문수. 중기. 신익성.(선조 사위) 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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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희안(姜希顔, 1417(태종 17)-1464(세조 10)) 시와 글씨, 그림에 뛰어났던 조선 전기의 문신.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의 훈민정음 28자 해석을 덧붙이기도 하고, 박팽년, 신숙주 등과 함께 운회를 언문 번역하기도 했다. 단종2년 집현전직제학에 올랐고, 세조가 즉위하자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기도 했다. 단종 복위운동 혐의로 신문을 받았으나 화는 면했다. 세조 때 임신자를 녹여 글자를 새로 주조할 때 글씨를 직접 썼다(을해자). 필적은 세상에 전하는 것이 드물다.
2. 정난종(鄭蘭宗, 1433(세종15)-1489(성종20))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황해도관찰사, 평안도병마절도사,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조맹부체에 뛰어나 세조가 원각경을 인쇄하기 위해 찍은 을유자에 그의 글씨를 사용하도록 했다.
3. 열성어필(列聖御筆) 조선 태조로부터 경종에 이르는 역대 임금의 어필(御筆)을 모아 판각(板刻)한 법첩(法帖).
4. 해동명적(海東名蹟)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신공제(申公濟:1469∼1536)가 역대 명가(名家)의 글씨를 탁본한 책.
5. ≪자치통감강목≫은 조선 세종 20년(1438)에 간행된 중국의 역사서이다. 이 책은 송의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대해 ≪춘추≫의 체재에 따라 사실에 대하여 큰 제목은 강(綱)을 따로 세우고, 사실의 목(目)으로 구별하여 강목의 형식으로 편찬한 것이다. 세종은 이 책을 애독하여 신하들에게도 읽기를 권장하였으며, 또 집현전 문신들에게 명하여 ≪훈의≫까지 만들게 하였다. 그 훈의가 완성되자 세종은 그 간행에 필요한 종이 350,000권(700만장)을 중앙과 지방에 만들게 하여 총 권수 139권에 달하는 방대한 책을 간행해 냈다. 이 때에 중간 글자와 작은 글자는 갑인자를 사용하고 강의 대자는 진양대군(晉陽大君) 유(뒤의 세조)가 글씨를 써서 연(鉛)으로 주자한 병진자를 사용하여 ≪사정전훈의자치통감강목(思政殿訓義資治通鑑綱目)≫을 찍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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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희안(姜希顔, 1417(태종 17)-1464(세조 10)) 시와 글씨, 그림에 뛰어났던 조선 전기의 문신.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의 훈민정음 28자 해석을 덧붙이기도 하고, 박팽년, 신숙주 등과 함께 운회를 언문 번역하기도 했다. 단종2년 집현전직제학에 올랐고, 세조가 즉위하자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기도 했다. 단종 복위운동 혐의로 신문을 받았으나 화는 면했다. 세조 때 임신자를 녹여 글자를 새로 주조할 때 글씨를 직접 썼다(을해자). 필적은 세상에 전하는 것이 드물다.
2. 정난종(鄭蘭宗, 1433(세종15)-1489(성종20))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황해도관찰사, 평안도병마절도사,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조맹부체에 뛰어나 세조가 원각경을 인쇄하기 위해 찍은 을유자에 그의 글씨를 사용하도록 했다.
3. 열성어필(列聖御筆) 조선 태조로부터 경종에 이르는 역대 임금의 어필(御筆)을 모아 판각(板刻)한 법첩(法帖).
4. 해동명적(海東名蹟)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신공제(申公濟:1469∼1536)가 역대 명가(名家)의 글씨를 탁본한 책.
5. ≪자치통감강목≫은 조선 세종 20년(1438)에 간행된 중국의 역사서이다. 이 책은 송의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대해 ≪춘추≫의 체재에 따라 사실에 대하여 큰 제목은 강(綱)을 따로 세우고, 사실의 목(目)으로 구별하여 강목의 형식으로 편찬한 것이다. 세종은 이 책을 애독하여 신하들에게도 읽기를 권장하였으며, 또 집현전 문신들에게 명하여 ≪훈의≫까지 만들게 하였다. 그 훈의가 완성되자 세종은 그 간행에 필요한 종이 350,000권(700만장)을 중앙과 지방에 만들게 하여 총 권수 139권에 달하는 방대한 책을 간행해 냈다. 이 때에 중간 글자와 작은 글자는 갑인자를 사용하고 강의 대자는 진양대군(晉陽大君) 유(뒤의 세조)가 글씨를 써서 연(鉛)으로 주자한 병진자를 사용하여 ≪사정전훈의자치통감강목(思政殿訓義資治通鑑綱目)≫을 찍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