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고의 명필을 꼽는다면 과연 그 자리는 누가 차지할 수 있을까요. 명필이라는 호칭이 가능하려면 글씨도 물론 잘 써야 하지만 그 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업적과 영향력에 있어서도 돋보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봉래 양사언1의 경우 글씨가 좋았지만 그 이후에 누구에게 영향을 준 바가 적고 맥이 끊겨 유파를 형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후대에 손꼽히는 명필이라고 일컬어지기가 어렵습니다.
조선 초기의 안평대군, 중기의 석봉 한호, 후기의 추사 김정희 이 세 사람이 흔히 뽑는 조선의 삼대 명필이 될 것이고, 서예에서 이광사의 영향이 적지 않으니 그를 추가하여 조선의 4대 명필을 꼽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초서의 명필을 따로 언급한다면 황기로黃耆老(1521(중종 16)-미상)나 좀 전의 양사언 등을 뽑을 수 있겠습니다.
먼저 조선 전기의 명필 안평대군과 그 형제들인 문종과 세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안평대군의 대표적인 글씨는 그 유명한 안견의 그림 몽유도원도에 쓴 제발이 있습니다.
안평대군이 쓴 몽유도원도 제발문
몽유도원도 그림과 함께 쓰여져 있는 안평대군의 해서 제발이 가장 유명한 그의 글씨가 될 터이고, 또 하나는 2008년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열렸던 “보묵(寶墨)” 전에서 선보였던 지장보살 본원경 글씨가 될 것 같습니다. 당시 이 글씨가 큰 화제였습니다. 감지에 금니로 쓴 이 지장경 글씨는 두 가지 글씨체로 써 있었는데, 뒷부분의 약간 두터운 글씨에 대해서 최완수 선생께서는 강희안의 것으로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지장경이란 대개 어떤 한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쓰는 것이므로 여러 사람이 나누어 썼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아직 명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같은 책의 글씨라 하더라도 이렇게 미묘하게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안평대군 「지장보살본원경」 부분, 『매죽헌필첩』, 감지금니
안평대군은 문예를 매우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6세의 너무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글씨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 또한 아까운 일입니다. 제가 알기로 예전에 D화랑에 안평대군 한 점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이 외에 조선시대의 금속활자 중 하나인 경오자(庚午字)가 안평대군의 글씨를 떠서 만든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경오자로 인출된 『상설고문진보대전詳說古文眞寶大全』1452년
즉, 안평대군의 글씨는 몽유도원도의 발문과 사경, 탁본으로 남아 있는 "도의편擣衣篇" 글씨, 경오자 활자 등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훈민정음의 글씨가 안평대군의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훈민정음의 글씨를 누가 썼는지는 지금껏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데, 세종의 큰 업적이니 명민하고 글씨를 잘 썼던 그의 아들 안평대군이 대업을 돕지 않았을까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추측일 수 있습니다.
중국의 시선 이백李白이 지은 「도의편擣衣篇」을 안평대군이 옮겨쓴 것. 탁본.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미술관
안평대군 글씨의 특징을 간단히 말한다면 ‘전형적인 송설체’-조맹부의 글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국 조맹부의 글씨. 「현묘관중수삼문기玄妙觀重修三門記」부분.
지난번에 언급했듯 만권당을 통해 조맹부의 글씨가 조선에 유입되면서 이것이 조선에 송설체가 크게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진필도 있었겠지만 탁본 같은 것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 탁본이 조선 초기의 글씨에 어마어마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실 조맹부는 송 태조의 11대손으로 송 고종의 글씨를 배운 황제의 글씨라 해서 더 귀히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집현전의 많은 학자들, 즉 박팽년, 신숙주 등은 모두 송설체의 글씨를 썼습니다. 조선 전기 100여 년 동안 이 송설체의 영향력이 대단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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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 1517(중종 12)-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형 양사준(楊士俊), 아우 양사기(楊士奇)와 함께 글에 뛰어나 중국의 삼소(三蘇: 소식·소순·소철)에 견주어졌다. 아들 양만고(楊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자연을 즐겨 회양의 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감상했다.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봉래풍악원화동천)’이라 글씨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2)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 1521~?) 조선 전기의 서예가로 초서의 일인자로 전해지며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낙동강 서쪽 보천산 위에 고산정 또는 매학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글을 읽고 글씨를 쓰며 여생을 보냈다. 『근묵(槿墨)』 등에 진적이 전하며, 이백의 「초서가행」을 쓴 초서필적이 석각으로 남아 있다. 충주의 이번신도비(李蕃神道碑, 1555) 비문으로 글씨를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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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 1517(중종 12)-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형 양사준(楊士俊), 아우 양사기(楊士奇)와 함께 글에 뛰어나 중국의 삼소(三蘇: 소식·소순·소철)에 견주어졌다. 아들 양만고(楊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자연을 즐겨 회양의 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감상했다.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봉래풍악원화동천)’이라 글씨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2)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 1521~?) 조선 전기의 서예가로 초서의 일인자로 전해지며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낙동강 서쪽 보천산 위에 고산정 또는 매학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글을 읽고 글씨를 쓰며 여생을 보냈다. 『근묵(槿墨)』 등에 진적이 전하며, 이백의 「초서가행」을 쓴 초서필적이 석각으로 남아 있다. 충주의 이번신도비(李蕃神道碑, 1555) 비문으로 글씨를 남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