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에 대세였던 송설체에 대해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송설체는 중국 원나라 조맹부의 서풍書風을 말합니다. 그의 서실 이름이 송설재松雪齋였다고 해서 송설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고려말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에 가 있을 때 하사받은 집 만권당에 조맹부가 많이 방문하고 교유를 했습니다. 고려에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충렬왕14)-1367(공민왕16)) 등이 만권당을 방문하고 여기에 오갔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많은 자료들이 조선으로 유입됩니다. 한국에 송설체 체본이 많이 돌아다니게 된 것이죠. 이 송설체는 기존의 왕희지체1)를 좀더 통통하게 쓰면서도 삐침 같은 부분이 길쭉한 모양이 많고, 힘과 아름다움을 겸했습니다. 이 글씨가 송나라 말에서 원나라까지 유행하게 됩니다.
송설체는 중국 원나라 조맹부의 서풍書風을 말합니다. 그의 서실 이름이 송설재松雪齋였다고 해서 송설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고려말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에 가 있을 때 하사받은 집 만권당에 조맹부가 많이 방문하고 교유를 했습니다. 고려에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충렬왕14)-1367(공민왕16)) 등이 만권당을 방문하고 여기에 오갔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많은 자료들이 조선으로 유입됩니다. 한국에 송설체 체본이 많이 돌아다니게 된 것이죠. 이 송설체는 기존의 왕희지체1)를 좀더 통통하게 쓰면서도 삐침 같은 부분이 길쭉한 모양이 많고, 힘과 아름다움을 겸했습니다. 이 글씨가 송나라 말에서 원나라까지 유행하게 됩니다.
송설체. 안평대군 이용, ‘재송엄상좌귀남서(再送嚴上座歸南序)’ 부분, 견본묵서
왕희지 난정서 집자 모필. 후대의 사람들이 글씨를 모아 베껴쓴 것.
석봉체도 당연히 송설체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왕희지체의 분위기로 다시 돌아간 부분이 있습니다. 송설체가 삐죽삐죽하다면 왕희지체는 덜 길고 둥근 느낌이 큽니다. 고려말 조선초기에 안평대군이 송설체를 잘 쓰는 바람에 송설체가 크게 유행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몽유도원도 발문을 보면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정인지 등이 남긴 글씨가 있는데 모두 비슷한 송설체를 쓰고 있지만, 안평대군이 그 중에서도 탁월합니다. 문종, 수양대군(세조), 안평대군 세 형제가 모두 글씨가 아주 좋고 그중 안평대군이 시서화 삼절로 불릴만큼 재주가 뛰어났는데, 그가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이름을 떨치면서 조선 초기 송설체의 유행의 중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몽유도원도 발문
문종(좌), 수양대군(세조)(우) 형제의 글씨
석봉 한호 이후 한참을 지난 후 17세기 말이 되어서야 백하 윤순과 원교 이광사의 글씨가 등장하게 됩니다. 명나라의 명필로 동기창董其昌2), 문징명文徵明3), 축윤명祝允明4) 세 사람을 들 수 있는데, 백하 윤순은 이 중에서 특히 문징명의 영향을 받아 강약이 있으면서 활달한 특징을 보였습니다. 문징명의 글씨는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미불에게서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송나라 때의 미불米芾5), 소동파蘇東坡6), 황정견黃庭堅7)의 글씨가 주요한 세 개의 뿌리라고 한다면 그 중 미불의 영향을 받은 모습이 보입니다. 후에 추사 김정희가 이광사를 비판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사람들의 글씨가 비문의 글씨보다는 왕희지 서첩 탁본 같은 것을 많이 보고 배운 탓에 원래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된 것을 쓰게 되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모각하는 글씨는 아무래도 원래의 글씨와는 조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죠. 한나라 탁본 글씨의 오리지널을 추사 때에 이르러 확인하게 되는데 글씨가 많이 바뀌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한나라의 비석을 임모하면서 이런 일들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죠. 이제 그 이후에는 전통적으로 써 내려온 글씨와 원본의 비석 글씨가 융합되게 됩니다.
조선의 글씨에서는 이밖에도 경오자, 을해자, 을유자 등의 활자에 대한 이야기, 김현성, 조문수, 성수침, 성혼, 윤선거, 윤순거, 퇴계와 율곡, 송준길, 송시열, 김창흡, 조윤형 등등 조선시대 글씨로 이름 석자를 남겼던 사람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유명 화가였던 사람, 문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들의 글씨는 어땠는지, 그 사람들의 정치적인 인생 역정에 대해서도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풀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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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진(東晉) 사람인 왕희지는 한나라 때 생겨난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승화시킨 중국 최고의 서예가였다. 생존 당시에도 그의 서체를 알아주는 사람이 많아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당나라 태종은 그의 글씨를 수집하여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아끼다가 죽을 때 관에 넣어갔다고 한다. 진적(眞跡)은 전해지지 않고 탁본만이 전해지는데 서풍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기품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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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진(東晉) 사람인 왕희지는 한나라 때 생겨난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승화시킨 중국 최고의 서예가였다. 생존 당시에도 그의 서체를 알아주는 사람이 많아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당나라 태종은 그의 글씨를 수집하여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아끼다가 죽을 때 관에 넣어갔다고 한다. 진적(眞跡)은 전해지지 않고 탁본만이 전해지는데 서풍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기품이 높다.
2) 동기창董其昌(Qichang Dong, 1555(명 가정 34)-1636(승정 9)). 중국 명대 후기의 서화가로 서화에 능하고 고금의 명필을 연구하였다. 화론가이기도 해서 서화를 남북 양종으로 나눠 그 계보를 만든 사람으로, 그의 화풍, 화법과 함께 명말 청초 이후 남종화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3) 문징명文徵明(Zhengming Wen, 1470(명 성화 6)-1559(가정 38)). 중국 명대의 서화가. 모든 글씨체에 능했으며 처음에는 왕희지(王羲之)풍을, 만년에는 황정견(黃庭堅)을 따랐다.
4) 축윤명祝允明(Yunming Zhu, 1460(명 천순 4)-1526(명 가정 5)). 중국 명대 중기의 서예가. 문징명文徵明, 서정경徐禎卿과 함께, ‘오중사재자吳中四才子’라 불렸다.
5) 미불米芾(1051-1107). 중국 북송北宋의 서예가·화가. 수묵화뿐만 아니라 시, 서, 고미술 일반에 조예가 깊었다. 글씨에 있어서는 송4대가의 하나로 꼽히며, 왕희지王羲之의 서풍을 이었다. 강남의 물기어린 아름다운 자연을 묘사하기 위하여 독자적인 점묘법을 창시해 원말 4대가와 명나라의 오파吳派에게도 그 수법이 전해졌다.
6) 소동파蘇東坡 (1037.1.8 ~ 1101.8.24). 소식. 북송의 문인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문장가. 부친 소순蘇洵은 구양수歐陽脩, 왕안석王安石 등과 교우하며 송나라에서 이름난 문장가였다. 그의 가문은 부유한 지식인 집안으로 명망이 높았다. 소동파는 송나라 최고의 시인이며, 문장에 있어서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대표작 《적벽부(赤壁賦)》.
7) 황정견黃庭堅 (1045(북송 경력 5)-1105(숭령 4)). 중국, 북송의 시인, 서가. 송 4대가의 한사람. 독특한 초서를 즐겨했는데, 주월周越, 안진경, 장욱張旭, 회소懷素 등에게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