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느 강은 파리 한복판을 흐르지만 강가에는 의외로 버드나무가 잘 보이지 않는다. 여름철 세느 강에 만들어지는 인공백사장 플라주(Plage)에 그늘을 드리우는 것은 플라타나스 나무이다.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세느강에는 중지도가 두 곳 있다. 하나는 노트르담 성당이 있는 시테 섬이고 다른 하나는 시테 섬 동쪽과 거의 닿을 듯이 있는 것이 생루이 섬이다. 두 섬은 생루이 다리(pont Saint-Louis)로 연결돼있다.
생루이 다리 근처의 버드나무
시테 섬에서 생루이 다리로 들어서는 오른쪽에 무성하게 보이는 나무가 파리 시내에서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버드나무이다. 파리에서는 이처럼 드물기는 해도 버드나무 자체가 이색적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버드나무 문양이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버드나무 문양은 실은 유럽에서 동양도자기하면 연상되는 대표적인 모티프이다.
물론 프랑스에서의 인연은 파리의 버드나무처럼 엷은 게 사실이다. 프랑스 도자기를 대표하는 세브르에서는 이 버드나무 문양을 넣은 도자기를 결코 만들지 않았다. 세브르가 왕립 그리고 이후에 국립이었던 까닭도 있지만 다른 곳의 민수용 공방에서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바다 건너 영국에 이르면 사정이 전혀 달라진다. 영국 도자공방에서는 시누아즈리가 유행할 때 버드나무 문양이 든 도자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버드나무 문양 도자기는 박람회 시대에 중산층에까지 확산된 이국취향에 편승해 대히트 상품이 됐다. 청화로 버드나무 문양을 그려 넣은 도자기를 영국에서는 윌로패턴 블루앤화이트(Willow patter White and Blue)라고 한다.
[참고] 조사이어 스포드 제작의 윌로패턴 청화백자 접시
이 문양이 든 도자기는 대부분이 원형이거나 길쭉한 팔각형 접시이다. 이른바 오후의 티타임에 홍차와 함께 쿠키를 내놓고 먹던 접시로 쓰였다. 접시의 문양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비슷하다.
우선 접시 중앙에 물가를 배경으로 파고다처럼 보이는 큰 중국 저택이 있다. 그리고 이를 감싸듯 저택 주변에 지그재그 형태의 담장이 둘러쳐져 있다. 버드나무는 바로 이 앞에 있다. 마치 먼지털이개처럼 보이기도 한다. 몇 가닥 섬유가 하늘하늘 흔들리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 위쪽으로 새 두 마리가 날개를 펴고 날고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집 앞 물가에 놓인 다리이다. 중국의 무지개다리를 닮은 다리 위에는 달려가는 모습의 세 사람이 나란히 그려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 세 사람은 누구인지 정해져 있다. 중국인 고관의 딸과 그녀와 사랑에 빠진 비서 청년 그리고 이들을 뒤쫓는 부친인 관리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좀 길지만 소개하면 이렇다.
대저택에 사는 사람은 고급관리 즉 만다린은 세관장이다. 하지만 부패로 인해 주변에서 불평을 듣게 되자 황제에게 은퇴를 청하고 대저택에 은거하게 된다. 그리나 잔무 정리가 필요해 창이란 청년을 고용한다. 그는 일을 마친 청년을 내쫓으려 했으나 이미 그는 고관의 무남독녀 콩세를 사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을 용인할 수 없는 고관은 다진 공작에게 딸을 시집보내고자 날을 잡아 잔치를 열었다. 이때 우연히 고관의 집에 드른 창이 콩세를 데리고 도망가게 되는데 접시 속의 다리 위 장면은 바로 이를 그린 것이다. 맨 앞에 선 사람이 콩세이고 두 번째가 창이다. 그는 다진 공작이 콩세의 환심을 사려고 가져온 보물 상자를 가로채 달아나고 있다. 그리고 그 뒤가 채찍을 들고 이들의 쫓아가는 고관이다.
이 이야기에는 후편이 있다. 둘은 무사히 고관의 추격을 뿌리쳐 고관의 하녀가 사는 집, 즉 접시 왼쪽에 보이는 작은 집에 들어가 숨어들어가 살게 됐다. 그러다가 다시 추격대가 쫓아오자 접시 위쪽에 보이는 섬으로 도망친다. 섬에 숨어 살면서 창은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해 마침내 농업에 관련된 책을 써내 유명해졌다.
그런데 유명세 덕에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다진에게도 알려졌다. 다진은 군사를 보내 이들을 붙잡아오게 했다. 창은 이들을 상대로 용감히 싸웠으나 부상을 당했고 이를 본 콩세는 집에 불을 지르고 콩세와 창은 함께 불속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 하늘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신은 이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 두 사람을 비둘기로 변신시켰다.(접시에 보이는 새 두 마리는 이를 가리킨다) 그리고 다진에게는 천벌을 내려 병들어 죽게 했다.
이 긴 이야기는 모두 도다 마사히로(東田雅博) 교수가 쓴 『버드나무 문양의 세계사』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마사하로 교수에 따르면 이는 전적으로 영국의 도자업자가 꾸며낸 얘기라고 한다. 버드나무 문양 도자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대개 1795년 무렵 영국인 조사이어 스포드(Josiah Spode 1733–1797)가 창안했다고 그는 말한다.
스포드 자기의 설립자인 조사이어는 당시 유행하던 청화자기를 만들면서 스누아즈리를 마케팅 포인트로 삼아 애틋한 중국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윌로패턴 청화백자는 이후 20세기 초까지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수백만 개가 수출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클리냥쿠르의 윌로패턴 블루앤화이트
영국의 템즈 강가에 버드나무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분명치 않다. 세느 강가의 버드나무는 매우 드문데 클리냥쿠르에 가면 이 윌로패턴 블루앤화이트를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베르네송 시장에서도 19세기말에 영국에서 만든 윌로패턴 청화백자 접시를 쉽게 볼 수 있다.
그 중는 세 개로 쪼개진 것을 걸쇠로 이어붙인 것도 있다. 주인 말에 의하면 원래는 80유로지만 70유로까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음 집에는 완전한 것이 있다. 가게 주인은 중국인으로서 그는 무뚝뚝하게 450유로를 불렀다.
윌로패턴 청화백자는 시느와즈리 유행에 편승에 만들어졌으나 그 이후 200년 넘게 제작됐다. 박물관, 미술관의 동양미술 컬렉션은 서민들과는 무관한 미술품이지만 이쪽은 일상생화 깊숙이 들어와 오래도록 이국 취향을 만족시켜준 대용품이다. 이처럼 유럽에서 동양에 대한 역성은 뿌리가 매우 깊다고 말할 수 있다.
파리의 동양미술 산책은 이것으로 끝나는데 아쉬운 점은 미술관의 컬렉션이든 서민 사회의 대용품을 다루는 시장이든 조선 도자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리오리엔트』에서 17세기, 18세기에 보인 중국의 번영은 차와 도자기 그리고 비단 교역에서 누린 압도적 우위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 시절 이 세 가지와 무관했다.
조선시대 한양의 왕가, 사대부는 물론 문인들 사이에서 조차 밥숟가락 놓기 무섭게 숭늉만 찾았을 뿐 차를 마시지는 않았다. 차는 남쪽 끝으로 유배 간 극소수의 인사들이 마셨으나 산업으로는 발돋움하지 못했다.
도자기는 세계 어느 곳보다 먼저 명초의 청화자기를 받아들였으나 조선말까지 그것으로 일관하고 말았다. 조선에서 기술을 배운 일본조차 오채 자기를 굽고 베트남도 채색자기 제조의 대열에 합류했으나 조선은 말기에 이르기까지 유상채(釉上彩) 기법은 끝내 시도되지 않았다.
비단은 잘 모르겠지만 파리의 동양미술 산책에서 조선 미술의 흔적이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데에는 세계 주요 교역품이었던 도자기와 차에 있어 조선의 그런 사정이 그 배경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