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메에서 일본실과 나란히 있는 한국실은 알고 보면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보다 먼저 생긴 곳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인 총독부박물관의 설립은 1915년이다. 그에 비하면 기메의 조선실은 1893년에 오픈했다. 정확히는 4월11일이다.
한국실 모습(안쪽에 이타미 준이 기증한 노안도 병풍이 보인다)
개관이 가능했던 것은 샤를르 바라(Charles Varat 1842/3-1893)가 수집한 조선 자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라는 19세기말 조선에 왔던 프랑스의 전형적인 탐험가이다. 그는 1888년 프랑스 교육미술성으로부터 극동지방의 자료를 수집해줄 것을 의뢰받았다. 수집 목적은 트로카데로 성(이 성은 1935년에 철거되고 대신 지금의 샤이요성이 세워졌다)에 있던 민족지학(民族誌學) 박물관을 위해서였다.
그는 우선 캐나다로 건너가 미국을 횡단한 뒤에 태평양을 건너 일본으로 왔다. 그리고 쿠릴열도에서 남쪽의 규슈까지 여행하며 다양한 일본 자료를 수집했다. 그런 다음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만주를 거쳐 발해만의 연태(烟台)로 내려와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다. 이때가 1889년이었다.
그 무렵 조선에는 초대 주한공사인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가 와 있었다. 그의 도움을 받아 바라는 대규모 조사단을 꾸렸다. 12명 일행에 말이 8필이나 되는 조사단이었다. 이 일행은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여행했다. 가는 곳마다 많은 것을 수집했다. 특히 불교와 무속관련 자료를 많이 구했던 것으로 전한다. 그림 중에는 민화가 많았고 또 구한말 외국인을 상대로 풍속화를 그려 팔던 직업화가인 김준근(金俊根 미상)의 그림도 있다.
샤를르 바라가 수집한 탈
그는 귀국한 뒤 미지의 나라 조선을 소개하는 책 『조선 여행(Voyage en Corée)』를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병마에 쓰러지면서 기메의 조선실이 오픈한 지 열하루 뒤인 4월22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수집품이 트로카데로로 넘어가지 않고 기메로 오게 된 것은 병중에 있던 그가 기메에 기증한다고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기메에 있는 탈과 도자기, 불상, 의상 등은 상당수 그가 1889년에 수집한 것들이다.
기메의 조선실 오픈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촉탁으로 일한 조선인 홍종우(洪鍾宇 1854-?)이다. 역사쪽에서 그는 김옥균을 암살한 자객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프랑스로 보면 파리에 처음 나타난 조선인 남자이기도 하다.(여자로는 1890년 공사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플랑시가 데리고 간 궁녀 이진이 있다)
한국실 오픈 무렵의 홍종우
그의 행적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은데 30대 후반에 단신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돼있다. 도쿄에서는 아시히 신문에서 문선공으로 일했다. 이때 모은 돈으로 1890년12월 프랑스로 건너갔다고 한다. 도불 목적은 법학 공부였다. 그는 상투 차림에 한복 스타일로 파리 시내를 돌아다녀 당시 동양 취미에 빠져있던 파리지앵들의 주목을 끌며 신문에도 소개됐다.
기메와는 인연은 잡지에서 일했던 레가메의 소개를 통해서 맺어졌다. 그는 법학 공부는 제대로 끝내지 못했으나 파리에 있을 때 조셉 앙리 보에(필명은 J.H.로니)와 함께 춘향전과 심청전을 번역한 것으로도 전한다.
기메에는 1892년부터 일을 하며 개관을 도왔다. 그가 파리를 떠난 것은 1893년 7월로 조선실이 오픈된 지 세달 쯤 지난 뒤이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다시 일본에 들렀다. 이때 김옥균의 암살을 위해 일본에 와있던 이일직(李逸稙)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를 도와 김을 상해로 유인한 뒤 권총으로 살해한 것이다. 기메 자료실에는 배자 차림에 정자관을 쓰고 손에는 흰 장갑을 든 그의 흑백 사진이 남아있다.
기메 한국실에는 1896년부터 1906년까지 두 번째로 서울에 부임했던 콜랭이 수집한 자료도 상당수 있다. 두 번째 부임에 앞서 에밀 기메는 특별히 그를 만나 조선의 회화자료를 수집해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콜랭이 기증한 국청사 감로탱
콜랭이 그의 부탁에 따라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던 화원 이한철(李漢喆 1812-1893이후)의 병풍과 국청사 감로탱을 구한 것으로 전한다. 콜랭의 첫 번째 임기 중에 수집한 물건이 세브르에 있는 것이 비해 이 두 번째 임기 때 모은 것은 전부 기메에 전해졌다고 할 수 있다. 콜랭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렸을 때 조선의 첫 참가를 주선했다. 이때도 전시하고 남은 물건은 대부분 그가 주선해 기메에 기증됐다.
미셀 칼망 기증의 청화 흑백상감 모란문 화분받침
기메 한국실에는 이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해 중국실의 그랑디디에나 미셀 칼망처럼 콜랭 살롱, 바라 살롱이라는 설명 패널을 걸어놓고 있다. 도자기수집가 칼망도 한국실에 기여한 바가 있다. 대형 화분받침처럼 보이는 모란 문양의 흑백상감청자 한 점을 기증했다.
한국실의 근간은 바라와 콜랭의 수집품으로 이뤄져 도자기는 백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것도 대부분 구한말 생활용기로 쓰던 것들이다. 청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그런 점에서 칼망의 기증작이 눈길을 끈다.
민화 산수도(부분), 이우환 컬렉션
기증품을 아니지만 회화로 볼만한 것으로 이우환 화백의 민화 컬렉션이 있다. 이 화백은 자신이 모은 민화를 가지고 이곳에서 2001년 가을부터 2002년 1월까지 특별전을 열었다. 전시가 끝나고 그는 컬렉션을 가져가지 않고 한국을 소개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이를 기메에 위탁 관리시켰다. 상설 전시에 빠지지 않고 소개되는 걸작 민화는 이 화백의 컬렉션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이타미 준 기증의 백자 항아리
재일건축가였던 이타미 준(伊丹潤 1937-2011) 역시 생전에 자신이 수집한 도자기와 회화 여러 점을 기증했다. 양기훈(楊基薰 1843-1919 이후)이 그린 <노안도> 병풍은 그가 기증한 그림 중 하나이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