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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5. 프랑스 중앙아시아 탐험대가 가져온 부처와 보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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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프랑스의 인도불교미술사 대가인 푸셰가 북인도의 영국 수비대가 있는 호티 마르단을 방문하였다. 그는 초대받은 장교식당에서 벽난로를 장식하고 있는 일군의 부조를 보고 심장이 멎을 만큼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는 ‘아, 이 수비대는 흥미로운 그리스 미술관을 가지고 있군요’라고 감탄하는데 그 내용은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간다라 불상 출현의 초기 양식을 보여주는 불상 부조였다.”

좀 장황한 인용이지만 이는 불교도상학에 관한 국내 첫 저술인 최완수 선생의  『불상연구』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책에는 불상이 인도에 어떻게 출현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건너왔고 또 어떻게 해서 중국식으로 토착화되었는지가 소상히 소개돼 있다. 인용한 내용은프 랑스 고고학자 알프레드 푸셰(Alfred Foucher 1865-1952)가 그리스 영향을 받은 간다라 불상과 처음 조우하는 장면을 다소 흥미롭게 각색한 대목이다.



유성출가 부조, 간다라출토 1~3세기, 길이 11cm

묘사한 것처럼 푸셰는 1895년부터 1897년까지 간다라 지방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는 이 탐험을 통해 간다라에서 불상이 처음 제작됐을 때 이 지방에 전파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
그가 ‘그리스 미술관이 있다’고 한 것은 나중에 그를 유명하게 만든 '간다라의 그리스양식 불교미술(L'Art Greco-Boudhique du Gandhara)'설을 처음으로 입 밖으로 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후에도 탐험을 계속했다. 1922년에 프랑스 아프가니스탄 합동탐험대를 이끌고 은둔의 왕국 아프가니스탄을 탐험하기도 했다.



2층 중앙아시아실

기메에는 푸셰가 발굴해온 대표적인 간다라 불상이 즐비하다. 미술관 외투보관소 앞 벽에는 간다라 양식의 부조가 하나 걸려 있다. 유성출가(踰城出家)의 내용을 새긴 것으로 물론 푸셰가 본 그것은 아니지만 간다라 양식의 부조이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미술은 2층의 중앙아시아실에 모아 전시돼 있다. 이곳의 전시작 중 몇 점은 『불상연구』에도 소개된 것이기도 하다.



보살 입상, 2세기 간다라출토, 높이120cm   
  

간다라 양식의 보살 입상도 그중 하나이다. 높이가 120cm로 청흑색 편암으로 만들어졌다. 수염을 근사하게 기른 쿠샨 왕조의 젊은 왕자가 한 손은 허리를 집고 있다. 다른 한 손은 앞으로 내밀고 있는 포즈이다. 굳게 다문 입에 반쯤 감은 눈에도 서양인 얼굴 인상이 물씬하다.



미륵보살 입상, 2세기후반 간다라출토, 높이 84cm

이 불상과 나란히 서있는 또 다른 독립상-이것도 푸셰는 그리스 영향이라고 했다-도 간다라출토의 미륵보살입상이다. 이 상도 제법 커 높이가 84cm이다. 간다라 미륵보살상에는 여타  보살상과 다른 특징이 있다. 머리 꼭대기에 터번이나 구슬 장식으로 묶은 높은 상투에도 불구하고 뒷머리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려 놓은 점이다. 이 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메의 간다라와 아프가니스탄 유물에는 푸셰 이외에 또 한 사람의 공로자가 있다. 기메 출신의 연구자인 조셉 아킨(Joseph Hackin 1886-1941)이다. 그는 룩셈브루크 출신이다. 부친이 마부였으나 파리로 나와 열심히 공부한 끝에 에밀 기메의 비서가 됐다. 이후 프랑스 국적도 취득하면서 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관보를 거쳐 정식 학예관이 됐다. 

그는 1923년 푸셰를 돕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갔다. 이후에도 그는 여러 차례 간다라와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해 독자적으로 불교 유적을 조사했다. 고고학자로서의 그의 명성은 나중에 보물창고라고 이름 붙은 베그람 남서쪽으로 10마일 떨어진 파이타바 유적을 발견하면서 유명해지게 됐다.



염견불 입상, 2세기후반 베그람출토, 높이 81cm  

이곳에서 발굴한 것 중 하나가 염견불(焰肩佛) 입상이다. 높이 81cm인 이 불상에는 어깨 양쪽은 물론 발바닥 아래에서도 화염이 솟구치는 듯한 기묘한 표현이 들어있다. 이 불상도 『불상연구』에 소개돼있다. 그에 따르면 이 불상은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에 나오는 부처로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빛을 발하는 부처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했다. 간다라는 물론 나중에 인도 고유의 불상 양식을 선보이는 마투라에도 이런 형상은 제작된 사례가 없다. 그런데 묘하게 중국에는 사례가 있다.


[참고] 포그미술관의 금동여래좌상

중국 최초의 불상으로 손꼽히는 것이 미국 하버드대학 부설 포그미술관에 있는 작은 금동불이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이 불상은 선정(禪定)에 든 부처를 나타낸 것이라고 보통 설명한다. 중국 출토지만 이 불상은 간다라에서와 같은 서양인 모습의 수염이 나있다. 뿐만 아니라 어깨에는 삐죽삐죽 화염이 치솟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돼 있다. 푸셰가 발굴한 불상이 그리스 영향을 보여주는 간다라 양식을 확인시켜는 것이라면 아킨의 불상은 간다라 불상의 중국 전파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인 셈이다.  

2층의 중앙아시아 미술실에는 이들 불상 외에 기메가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자료가 또 있다. 폴 페리오(Paul Pelliot 1878-1945)의 컬렉션이다. 페리오는 1908년 돈황을 탐험하며 방대한 자료를 가져와 20세기초 돈황학이란 새로운 중앙아시아학을 연 장본인이다. 그가 수집한 고고 및 미술자료가 이른바 페리오 컬렉션이다.   



페리오 수집의 테라코타 보살상, 6-7세기 툼슈크

페리오는 파리 출신으로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프랑스 동양학의 원조인 실방 레비(Sylvain Lévi 1863-1935) 밑에서 공부했다. 페리오가 수학하던 시절 프랑스는 쟁쟁한 학자들이 속출하며 전 유럽의 동양학계를 리드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은 비교언어학의 측면에서 중앙아시아에 관심이 많았다. 즉 타지키스탄 지역의 고문서에 보이는 언어가 인도유럽어와 같은 계통이란 점 때문이었다. 

그는 이곳을 졸업하고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극동학원에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하노이에 가기 전에 이미 중국어를 완전히 마스터했다. 1900년 중국서적 수집을 위해 베이징에 파견됐을 때 뜻밖에 의화단 사건에 휘말렸다. 그는 천재였을 뿐만 아니라 용감했다. 베이징의 프랑스 공관이 의화단원에 포위돼 공격을 받자 포위망을 뚫는 활약을 보여 나중에 귀국해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다음해 그는 재차 베이징에 파견됐다. 의화단 사건이후 베이징 시장에 대량으로 쏟아져 나온 서적, 문서 그리고 유물들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베이징 출장은 단속적으로 1904년까지 계속됐다.
이때 『고금도서집성』 초간본과 같은 희귀 서적은 물론 17세기 베이징에서 찍은 티벳대장경, 18세기 강희제판 몽골대장경, 만주어 책, 베트남어 책 등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했다. 거기에는 당시 시장에 흘러나온 청동기와 서화도 포함됐다.

1905년이 되어 중앙아시아탐험국제위원회 프랑스지부에서 중앙아시아 탐험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면서 그가 대장으로 뽑혔다. 페리오는 중학친구인 사진사와 군의(軍醫) 등 동행할 대원으로 정한 뒤 1년 동안 치밀한 사전준비를 했다. 그리고 1906년6월 파리를 출발해 모스크바와 타슈켄트를 거쳐 카슈가르에 들어갔다. 그는 이때에도 천재성을 발휘해 여행 도중에 러시아어와 현지의 터키어를 익혔다고 한다. 


페리오 수집의 목불상

우르무치에서는 의화단 사건에 연좌돼 유배돼온 청조 대신들과 유창한 중국어로 사귀었다. 이때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즉 돈황에 의문의 문서수장고가 발견됐다는 소문이 사실이란 점을 확인한 것이다. 문헌사학자로서의 촉각이 발동한 그는 단번에 고비사막을 횡단해 1908년 2월 돈황에 도착했다.

돈황 막고굴은 그보다 앞서 1900년에 발견됐다. 당시 이곳을 지키던 도사 왕원록은 담배를 피우다 담배연기가 벽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보고 13굴의 벽 뒤쪽에 작은 방이 감춰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당 이전의 고대 문서가 가득한 것을 알았다. 이것이 돈황 막고굴의 고문서 발굴인데 이 소문은 즉각 중앙아시아 각지로 퍼졌다. 당시 중앙아시아에는 유럽 각국의 탐험대가 와 있었으며 또 이들을 상대로 유물과 자료를 팔려는 현지 상인들이 다수 활동하고 있었다.

유럽탐험대 가운데 헝거리 출신의 영국탐험가 오렐 스타인(Aurel Stein, 1862-1943)이 이 소문을 맨 처음 들었다. 돈황으로 달려간 그는 왕도사를 구슬러 수천 점의 경전을 샀다. 그가 떠나고 한 해 뒤에 페리오가 도착한 것이다. 스타인은 중국어에 정통하지 못했지만 폐리오는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참고] 굴속에서 문서를 분류중인 페리오 모습

그는 왕도사와 교섭한 끝에 굴속에 들어가 직접 자료를 조사할 수 있었다. 그는 이후 3주 동안 굴속에서 꼼짝 않고 문서 전체를 훑어 봤다고 한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중심으로 1만여 점을 챙겼다. 기록에는 이때 왕도사에게 500냥(약 90파운드)를 지불했다고 한다. 신라승 혜초가 쓴 고대인도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도 이때 손에 넣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일약 스타가 됐다. 탐험의 시대에 걸맞게 일반인들도 관심도 높아 이들 사이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그후 그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중국학 평생교수직을 맡게 됐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것처럼 세르누치 미술관의 자문역할도 했다.


페리오 탐험대가 가져온 키질석굴의 벽화, 7세기

2층 11번홀과 10번방에는 그가 돈황에서 수집한 불상, 불화가 전시돼있다. 불상은 돈황에 도착하기 전에 거쳤던 구차, 툼슈크 등에서 수집한 것과 돈황 것이 섞여 있다. 또 키질에서 수집한 불교 벽화도 상설 전시돼 있다. 불화는 보존상의 이유로 불과 몇 점만이 번갈아 소개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가 가져온 방대한 양의 문서와 서적은 센강가의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거기에 있다.


페리오가 막고굴에서 찾아낸 당나라 그림 기마인물도, 7세기, 13x20cm

그가 막고굴에서 챙긴 그림들은 대개 불화이다. 불화 이외에 이채롭게 말을 타고 행차하는 귀인의 모습을 그린 종이 그림 하나 있다. 당나라그림은 벽화를 제외하고 종이든 비단에 오늘날 전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기마인물도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내용은 당나라 고종과 측천무후 사이에 난 아들로 684년에 죽은 장회태자(章懷太子 654-684)의 무덤에 그려진 기마인물 벽화와 매우 흡사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그림은 보존상의 이유로 평상시에는 거의 전시되지 않는다. 반면 돈황을 포함한 중앙아시아의 불화는 교대로 전시 소개되고 있다.(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8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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