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디디에 컬렉션이 있는 20번 방에서 색다른 도자기가 있다. 베트남 도자기이다. 국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베트남 도자기이다.(국립중앙박물관에는 3층 아시아관의 동남아시아실에 베트남 도자기가 몇 점 소개돼있다)
베트남은 1888년 프랑스식민지가 되기 이전에는 아시아에서 범중국(凡中國) 문화권에 속했다. 한국, 일본 그리고 오키나와와 마찬가지로 한자도 사용했다. 베트남과 중국의 접촉은 오대 시절부터 시작된다. 명이 중국을 통일한 뒤인 15세기 초에는 중국이 잠시 동안이지만 베트남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중국 문화는 이때 크게 유입됐다.
베트남 자기는 한국과는 무관하지만 일본에는 일찍부터 소개됐다. 다도구로 주로 알려졌다. 일본의 다도는 임진왜란 직전인 16세기후반 센노 리큐(千利休 1522- 1591)가 출현하면서 완성됐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가 수립한 차이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와비(佗)의 정신이다. 와비란 불완전하고 모자란 가운데 마음의 만족을 찾으려는 정신 자세이다. 이런 와비 차 정신에 걸 맞는 다도구로 찾은 것 중 하나가 조선 남부지방의 막사발인 이도(井戶) 다완이었다. 이도 다완의 특징은 장식이 일체 없을 뿐 아니라 인위적인 시도조차 잘 보이지 않는데 있다. 리큐의 후계자들은 이도 다완을 넘어 동남아시아까지 눈을 돌렸다.
대표적인 것 중 루손 쓰보(呂宋壺)라고 하는 항아리가 있다. 이는 필리핀의 루손 지방에서 물동이로 쓰던 것이다. 이것을 와비차 도구로 끌어들여 사용했다. 일본과 동남아시아와의 교역을 통해 들어온 것인데 안남(安南) 다완도 마찬가지였다. 안남은 당나라 때 하노이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베트남에서는 15세기 전후해 원명의 청화백자를 모방해 청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자기가 아닌 도기였다. 안남 청화는 문양이 흐릿하게 뭉개져 보이는 게 특징이다. 가마 온도를 통제하지 못해 도중에 안료가 날아가 버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불완전한 점이 오히려 일본 다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였다.
기메에 있는 베트남 청화는 명 점령이후에 제작된 것들이다. 독일 경제사학자이자 세계체제론자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Andre Gunder Frank 1929-2005)는 대표작 『리오리엔트: 아시아 시대의 세계경제(Reorient: Global Economy in the Age)』에서 18세기까지 중국이 세계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했으며 특히 도자기, 비단, 차의 교역을 통해 세계경제체제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책에서 중국의 도자기 교역에서 한 때 주춤한 시절이 있었는데 그것은 명청 교체기라고 했다. 그리고 1645년 들어 중국의 도자기 수출은 2/3가 감소해 1682년까지 회복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명이 멸망한 것은 1644년이다) 그 사이에 일본이 유럽에 수출한 것과 마찬가지로 베트남도 통킹을 통해 도자기 수출국에 가세했다고 설명했다.
물고기 문양의 베트남 청화도기
기메의 베트남 도자기는 이런 설명을 뒷받침 해주는 사례들이다. 이들 도자기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물고기 문양에 학이 그려져 있다. 청화 외에 오채 자기도 몇 점 있다. 코끼리 형상의 장식물은 오채 계통이다. 이는 유약을 발라 구운 뒤에 재차 안료를 발라 굽는 이른바 유상채(釉上彩) 기법이다.
베트남 청화도기와 오채도기
유상채 기법은 조선에서는 끝내 시도되지 않은 기술이다. 조선은 15세기에 명의 청화기법을 받아 들여 세계에서 두 번째로 청화자기 생산국이 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상채 기법으로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서 조선에서는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화려한 채색 자기의 세계가 끝내 존재하지 않게 됐다. 그에 비하면 베트남은 도기 단계에 머물렀지만 채색에서 만큼은 우리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세르누치 미술관의 15세기 베트남 청화도기
이들 베트남 자기는 그랑디디에 살롱에 소개돼 있으나 그의 수집품은 아니다. 그가 살던 시절만 해도 베트남 청화는 세상에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 베트남 해안에 중국 난파선이 발굴되고 거기에 실려 있는 청화 자기가 쏟아져 나오면서 이를 모방했던 베트남 청화가 새삼 주목을 받았다.
기메의 베트남 자기는 모두 2000년대 들어 입수한 것들이다. 일부는 기증을 받았고 일부는 구입했다. 세르누치에도 베트남 청화가 있으며 그곳 역시 2015년 이후에 구입했다고 설명돼 있다.
상아로 만든 곽자의 저택 앞면
그랑디디에 살롱에는 베트남 청화코너 바로 옆에 색다른 중국 골동품 하나가 놓여있다. 상아로 만든 집이다. 그냥 집이 아니라 이층 누각까지 갖춘 대저택이다. 여러 동의 건물로 이뤄져 있을 뿐 아니라 관복 차림의 남성과 화려한 옷을 입을 여성들의 모습도 보인다.
힌트는 집의 정면 기둥에 높이 걸린 깃발이다. 여기에 ‘분양왕(汾陽王)’이라고 쓰여있다. 분양왕은 당나라 중기에 실존인물 곽자의(郭子儀 697-781)를 가리킨다. 그는 장군이자 정치가로 안사의 난을 비롯해 여러 차례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냈다. 그래서 구국의 영웅으로 불리며 762년 분양왕에 봉해졌다.
곽자의 저택 옆면
이 저택은 명말청초에 민간에서 많이 감상된 ‘곽분양 축수도(郭汾陽祝壽圖)’를 상아로 만든 것이다. 곽자의는 분양왕에 봉해진 뒤에 두 번이나 중서령(즉 재상)을 역임했다. 그리고 그의 여덟 아들과 일곱 딸의 사위도 모두 높이 출세를 했다. 아들 중 하나는 당 대종(代宗 재위 762-779)의 사위가 됐고 손녀딸 하나는 나중에 황태후가 됐다. 그런 위에 본인도 85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세속의 행복을 모두 누린 그의 일생은 명말 청초에 희극으로까지 만들어져 시민 사회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곽분양 축수도’는 그런 열기가 바탕이 돼서 그려진 것이다.(달리 곽자의축수도라고도 한다) 그림은 공연도 벌어지는 성대한 생일잔치 모습으로 그리는 게 보통이다. 이 상아 저택도 그와 같은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상아 곽자의저택의 내부 모습
상아 저택과 관련해 캘리포니아대학의 비교경제사학자인 케네스 포메란츠(Kenneth Pomeranz)가 쓴 『대분기(The Great Divergence)』에 참고할 만한 내용이 보인다. 그 역시 안드레 군더 프랑크처럼 1750년 무렵까지 확실히 중국의 경제가 유럽을 능가했다고 주장하는 학자이다.
이 책에 소개된 내용 중에 1750년대 중국의 설탕소비는 1800년의 유럽보다 많았다고 했다. 당시의 중국의 설탕 소비에 관한 사례로 광동 지방에서는 부호들이 연회를 열 때면 수천 개의 설탕 단지를 준비해 나눠 주었다고 했다. 또 결혼식 때에 신부가 설탕으로 사람이나 동물 그리고 건물 모형을 만들어 가지고 갔다고도 했다.
포메란츠의 말대로라면 상아 저택의 뿌리는 설탕 저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상아 저택에는 청나라 가경제(嘉慶帝 재위 1796-1820)가 나폴레옹에게 보낸 예물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가경제는 1802년 나폴레옹이 쿠테타로 제1통령의 자리에 오르자 부인 조세핀을 위해 이를 보냈다는 것이다.(두 사람은 1796년에 결혼했다)
그런데 가경제가 보낸 상아 저택은 파리에 도착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이 이를 실은 배를 나포한 것이다. 여러 차례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이를 돌려주지 않아 끝내 상아 저택은 조세핀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이것이 역사 사실인데 기메의 설명문에는 애매하게 돼있다. 이 역시 오리지널’이라며 ‘나포 이전에 프랑스에 전해졌을 것’이라고 뜻 모를(?) 설명을 더해놓고 있다.(상아 저택은 1945년에 루브르에서 이관돼온 것이다)
가경제가 조세핀에게 보내고자 했던 상아 저택과는 별개로 또 다른 형태의 ‘곽분양 축수도’ 가 19세기 유럽에 많이 소개됐다. 파리의 패션디자이너 코코 샤넬(Coco Chanel 1883-1971)은 특히 이에 심취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18살 때 파리의 한 중국골동 가게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랄 물건을 봤다고 자서전에 썼다. 그녀가 본 것은 그림이 아니라 곽분양 축수도를 나무판에 옮기고 칠로 장식한 것이었다. 흔히 코로만델(coromandel) 병풍이라고 불린 것으로 이는 인도 벵갈만의 코로만델 항구를 거쳐 유럽에 들어온 목칠 병풍을 가리킨다. 대부분 호남성 일대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코코 샤넬 구장의 코로만델 병풍
그녀는 생전에 코로만델 병풍을 32틀이나 구입한 것으로 전한다. 방돔 광장에서 멀리 않은 캉봉 가에 있던 그녀의 집에는 이 병풍으로 벽지 대신 쓰거나 혹은 방문을 가리는 용도로도 썼다고 한다. 코로만델 병풍에 가장 많이 담긴 그림 내용이 바로 곽자의축수도이다. 그 다음이 화조도였다.
코코 샤넬이 생전에 소장했던 <곽분양축수도> 칠병풍은 2016년 겨울에 열린 기메의 ‘옥(Jade)’ 특별전에 출품돼 관심을 끌었다.(y)